관재(官災), 관제(官制), 관제(官製)
관재(官災), 관제(官制), 관제(官製)
  • 김기대
  • 승인 2014.04.30 1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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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우리가 지금 제대로 슬퍼하고 있는걸까?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라고 비판했다.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시대에 아무 일도 없던 양 서정시를 쓸 수는 없다고 한탄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 발언을 취소하기는 했지만 2차 대전때 유대인 학살을 목도한 그가 받았을 충격을 짐작할만한 발언이다.

5월은 한국으로 치면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이 있다. “5월은 푸르구나”로 시작하는 어린이날 노래처럼 5월이 우리에게 푸를 수 있을까? 세월호 침몰로 수백개의 가정이 무너졌고 ‘나라의 보배’들이 물속에서 죽어갔는데 아무 일도 없던 양 가정의 달을 기념할 수 있을까?

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인재니 천재니 하지만 이번 사고는 관재다. 정부와 구조 당국이라는 권력이 저지른 재앙이라는 뜻이다. 폭풍이 부는 것도 아니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곳에서 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데 침몰 순간 이후에는 단 한명도 구조해내지 못하는 이 재앙을 어찌 하늘의 탓으로 몇몇 기관사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 이것은 권력이 저지른 죄다.

권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다. 그들의 잘못을 알기에 모든 것을 통제하는 관제 (官制) 시스템을 가동한다. 구조 상황을 컨트롤 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의 표현을 통제하려 하고 언론을 통제하고 교육현장에까지 통제를 가한다. 심지어는 구조(시신 수습)순서까지 관제한다. 혹시 권력이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유가족들에게 기념 촬영을 같이 해 주겠다는 은혜(?)를 베푼다.

   
 
  ▲ 분노한 유가족이 박대통령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한 번이라도 유가족을 진솔하게 껴안아 주어야 할 대통령은 철저히 통제되고 연출된(흐트러진 머리카락) 모습으로 유가족과 마주했다가 몇몇 절규가 두려워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그녀는 모든 생각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유가족의 절규가 와 닿지 않는다. 전시도 아닌 상황에서 부모를 총으로 잃은 사람에게 그들의 슬픔이 뭐 그리 대단해 보이겠는가?

마침내 관제(官製)가 등장했다. 합동 추모소에 분향간 박근혜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유가족 대표가 사실은 청와대에서 섭외한 관제 유가족이라고 노컷 뉴스가 보도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행사에 납품되는 물건만 관제인지 알았더니 이제는 유가족도 정부가 만들어 내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다. 이 세가지 관재(관제)에서 우리의 순수한 추모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이제 울음을 그치라고 하는 것은 가장 안좋은 위로 방법이기 때문에 지금은 함께 울고 있지만 지금 이 거대한 슬픔도 혹시 관제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뜩문뜩 드는 것은 비단 나만의 기우일까?

   
 
  ▲ 합동 분향소에서 섭외한 일반인을 위로하는 모습을 연출(?)한 박대통령. 사진:YTN뉴스캡처  
 
교회가 침묵에 편승한다면?


우리는 관치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 착하고 순진한 아이들도 기다리라는 말만 듣고 기울어진 배안에서 기다렸다. 각종 무서운 놀이기구에 익숙한 세대인지라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이 몇몇 메시지들을 통해 드러났다. 그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앞에서 얼마나 울며 떨었을까? 자다가도 한숨이 나온다.

엄마 아빠의 말을 잘 듣던 아이들, 학교의 명령을 잘 따르던 아이들, 이것도 나라라고 나라에 좋은 일이 있으면 대~한~민~국!을 외치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관재로 죽어갔다. 아이들은 천진해서 그렇다고 치자. 어른들 또한 언제까지 이 세가지 관제를 방치할 것인가!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국가는 국민이 어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한다. 국가는 별 생각없는 평범한 국민, 즉 인터넷 세계를 전부로 알고 이곳에서 세상에 대한 원한을 내뿜거나 숨어서나 할 수 있는 비겁함을 일삼는 국민을 원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봉기를 일으킬 젊은이보다 이런 류의 젊은이를 좋아한다는 것이 마루야마 겐지의 주장이다.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그렇다. 대통령이 사과를 하면 뭣하겠는가? 그녀가 고도의 연출된 모습으로 사과를 함으로써 갑자기 식게될 분노가 나는 두렵다. 기획에 성공한 그들은 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북한이 포사격을 하자 연평도 주민에게 전화를 걸었던 SBS의 뉴스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앵커는 위기 상황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주민은 의외로 담담하다. 또 하나의 관제 기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300여명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 수수방관하는 정부가 과연 전쟁이 났을 때 우리를 보호해줄 능력이 될까? 이번 사태를 보면 ‘절대로 못한다’이다. 그러면서 북한을 자극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고리 발전소에 사고가 나면 수십만이 피해를 본다는데 우리는 그때가서 울고 모금할 것인가?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했다는 게 50%대다. 일부는 아직도 높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 통계를 믿는다. 소란이 싫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침묵이 언젠가 나에게 피해로 다가올 터인데 지금 당장 소란이 싫어서 무능한 권력에 기대는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관에 의해 움직여지는 이 무서운 현실 앞에서 소란이 싫어 침묵하라고? 이것은 관재보다 더 무서운 죄악이다. 이번 기회에 시민들이 각성하고 분노와 슬픔을 행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시민들의 조직 단체로는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교회가 오히려 통제와 침묵에 편승한다면? 생각하기 조차 싫은 비극이다.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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