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을 고민하라!
삶의 방향을 고민하라!
  • 김기대
  • 승인 2014.05.0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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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영화로 만나는 사도 바울] 프라미스드 랜드

사도 바울의 일생을 전기처럼 기술한 존 폴락의 <사도 바울>(홍성사)의 1부 제목은 ‘충절에서 변절로’다. 이 한마디는 바울의 회심을 설명하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 단연 돋보인다. 회심 전의 사도 바울을 죄인으로 보는데 익숙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지만 그는 죄인이라기 보다 방향을 상실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유대 공동체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유대교 가르침을 확신한 종교인이었다. 폴락의 말처럼 바울은 성실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다가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목에서 변절의 길을 택했다. 변절자가 충신이 되는 회심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로 바울을 바라보지 않으면 바울의 회심이 가진 깊이를 놓치게 된다.

폭력배에서 전도자로 회심한 사람도, 세상에서 온갖 못된 일을 저지르다 어느날 부흥강사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바울의 회심을 설명하는 예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었고 바울은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회심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영화가 있을까? <미션>(롤랑조페 감독, 1986)에 나오는 로드리고 멘도자(로버트 드니로 분)가 바울의 회심을 설명해 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는 노예상인에서 원주민 선교사로 변신하지만 그는 냉정한 노예 상인에다가 동생을 죽인 사람이었다. <사도>(로버트 듀발 감독, 1997)의 소니(로버트 듀발 분)는 목사에서 다른 형태의 목사로 회심했지만 아내를 자살로 위장해 죽인 살인이 계기였다. 역시 충절에서 변절의 경우가 아니다.

바울의 회심을 영화로 만날 수 있다면<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 구스 반 산트 감독, 2013)가 딱이다. 세계적인 에너지 기업 글로벌의 최연소 부사장인 스티브(맷 데이먼 분)는 천연 가스 매장지역인 맥킨리에 파견된다. 뛰어난 협상 능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온 스티브의 협상 노하우는 주민과의 솔직한 교감이다. 그는 가난한 시골출신이라는 점을 내세워 주민에게 다가가는데 이 방법은 항상 유리한 결과를 회사에 제공해 주었다. 이번 협상은 본사 발령이라는 또 하나의 승진이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현장에서 뛰는 마지막 협상이다. 스티브에게는 수 토마슨(프란시스 맥도맨드 분)이라는 여성 인력이 충원되었다.

인생은 수동 기어 같은것

이들은 도시인티, 또는 대기업 소속이라는 티를 내지 않고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변신을 시도한다. 수는 수동기어 차를 몰고 오는데 수동 기어차량을 운전할줄 모르는 스티브의 당황한 모습은 뭔가 쉽지 않은 협상과정에 예고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 마을에서 대학에 간 사람이 자신을 포함해 2명 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한 시골출신이지만 그는 대학에 갔고 취직을 했고, 협상에서 항상 이겼고, 그로 인해 승진을 했다. 피나는 노력 때문이겠지만 노력을 해도 안되는 인생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는 그냥 발만 얹어 놓으면 되는 자동 변속 장치 같은 인생, 즉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가야 성공한 것이라고 제시한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 순간 순간마다 기어를 선택해야 하는 수동같은 현실에서 그가 부딪혀야 할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다.

두 사람은 마을 상점에 둘러 시골 스러운 옷과 잡화를 구입한다. 대기업 소속의 젊은 부사장은 이제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첫번째 협상 가정을 방문한다. 그러나 스티브가 지금 막 산 옷에는 아직 가격표가 붙어 있다. 마음의 교감없이 단지 시골출신이라는 것만으로 그들과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을 스티브는 조금씩 깨쳐 나간다.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스티브에게 손쉬운 일이었다. 땅에 묻힌 천연가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그들의 토지를 사들이고, 마을 주민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은 강압이 아니라 가난한 시골 사람들에게 큰 경제적 혜택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처음에 3일 정도면 설득될 것이라고 여겼던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의 여론을 움직여 줄테니 돈을 달라는 사람에서부터 마을 개발에 찬성인지 반대인지 아리송한 상점 주인까지 그들의 여론을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프랭크라는 지역 학교 과학선생은 스티브가 만난 가장 큰 장벽이었다. 본사에서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MIT 박사, 보잉사 연구원 출신의 과학교사 프랭크(할 홀브릭 분)는 천연 가스에 대한 학술논문까지 섭렵한 강적이다. 스티브는 자기의 인생과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앞에서 첫번째 갈등을 느낀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 은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프랭크의 경력으로는 자신이 젊었을 때 누렸던 것들을 거의 그대로 누리며 도시에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티브의 인생 설계에는 은퇴연금의 축적과 은퇴후 안락한 삶이 자동으로 입력되어 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길을 택한 프랭크가 스티브에게는 의아하다. 초등학교 선생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도시에 살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스티브에게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쳐 준다.

인간은 그래서 죄인인 거야!

시골 사람들의 선한 모습은 스티브에게 좋은 인상을 주면서 동시에 손쉬운 협상 대상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선한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대하면 그들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계속해서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며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던 때에 환경운동가 더스틴(존크래신스키 분)이 글로벌의 천연 가스 사업을 막기 위해 마을에 온다. 그는 수압펌프를 이용한 가스 채굴 방법의 피해를 강조하며 반쯤 돌아선 마을 사람들의 여론을 뒤집어 놓는다. 당황한 스티브는 마을 축제를 후원하지만 그마저도 폭우로 엉망이 된다. 대기업 글로벌의 협상 전문가 스티브가 듣도 보도 못하던 조그만 환경 단체 소속 운동가에게 밀리고 있다. 앨리스에게 다소 모호한 태도를 보이던 스티브와 달리 더스틴은 자신있게 앨리스와 데이트를 즐긴다. 사업에서도 연애에서도 밀리던 스티브에게 갑자기 배달된 소포는 다시 역전의 기회를 제공한다. 네브라스카 출신의 더스틴이 자기 마을의 피해 사례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던 사진이 가짜라는 분석이 본사로부터 우송된 것이다. 네브라스카 주에는 바다가 없는데 개발의 여파로 소가 쓰러져 있고 마을이 황폐화되어 있는 사진에는 등대가 있다. 네브라스카 주에 있는 마을이 아닌 것이다. 환경 운동가 더스틴의 마을 사람 선동을 위한 조작이었다.

이제 스티브는 내일 있을 마을 사람들의 투표에서 승리를 확신한다. 그동안 더스틴 쪽으로 기울었던 사람들이 조작 사실을 알면 모두 스티브 편을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브는 더스틴으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듣는다. 더스틴 역시 글로벌 소속의 가짜 환경운동가였다. 처음에는 조작 사진으로 선동을 하다가 나중에 조작임을 고의로 흘리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환경 운동에 염증을 느끼고 글로벌사의 개발 계획에 표를 줄것이라는 인간 심리를 꿰뚫은 고도의 전략이었다.

사람의 선한 의도를 믿었던 스티브, 그것을 정직하게 표현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스티브, 그러나 그는 인간을 잘 몰랐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 보다는 선동과 감정에 이끌린다는 점을 알고 있던 글로벌은 가짜 환경운동가를 이용해 인간 심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바울 신학의 새 관점


바울이 과거의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많은 부분 배워 왔다고 주장하는 바울신학을 가리켜 바울신학의 새 관점 학파라고 부른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듯이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돼 있었으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것이라는 사상이 이미 유대교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톰 라이트(N. T. Wright)와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이 새관점학파인데, 사도 바울의 편지를 정치적으로 독해했던 야곱 타우베스 역시 <바울의 정치 신학>(그린비)에서 같은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새관점학파가 맞는지 전통적인 관점이 맞는지는 신학적 논쟁이므로 영화 이야기와는 맞지 않을 듯하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바울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그것이 구원의 수단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제쳐 놓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에게나 하나님에게 충실했다는 의미다.

율법을 향한 열정을 가진 바울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못 마땅하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율법에 해박하지도, 충실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감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은 유대 공동체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박해를 행하면서 뭔가 판단 착오를 깨달은 듯하다. 스티브가 프랭크를 만나면서 당황했던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박해에 앞장섰는데 스테반의 죽음이 바울의 충실함에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던 중에 다마스커스 사건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충실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에 당황한다. 그의 모든 노력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하늘의 음성은 눈이 멀을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결국 바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더스틴을 통한 글로벌의 접근 방법은 스티브로 하여금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를 던져 주었듯이 말이다.

스티브는 마직막 투표날에 모든 사실을 털어 놓고 우리에게는 낡고 빛바랜 헛간이라도 뭔가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연설한 후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멋진 부츠, 낡은 부츠

스티브가 본래 신고 있던 부츠(마을에서 구입한 것이 아닌)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하찮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스티브의 속마음을 대변한다. 마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스티브의 낡은 부츠를 보고 멋있다고 칭찬해 준다. 반면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마을을 먼저 떠다던 수는 이제 제발 그 부츠를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낡은 부츠에 대한 주민의 칭찬과 그 낡은 것 때문에 해고 당한 스티브가 안타까운 수의 말이 대비된다.

자기 신념을 평생 지킨다는 것은 변절과 배신이 당연히 여겨지는 시대에는 더욱 고귀하게 다가온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후에도 전향 각서를 쓰지 않고 수십년을 감옥에서 보내는 미전향 장기수들을 보면 존경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사람의 생각으로 형량을 거래하는 천박한 행위는 비판할 가치 조차 없는 일이지만 '그깟 종이 한장 써주고 감옥에서 나오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깟 종이 한 장에 서명 하나 해주는 것을 통해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신념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면서 동시에 그 신념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선불교적 상상을 해보는 것은 신념의 전향을 강요하는 폭력적 사회에 한 일원이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그분들이 안타깝기도 해서이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신념은 과연 그 신념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가치와 일치하는가? 혹시 포기가 두려워 신념보다 내 자신을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파계승이 해탈에 먼저 도달하는 것은 불교의 화두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지금 세상은 지켜야 할 고귀한 신념 조차 없어진 시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물욕과 무관심, 이기적 가족주의와 세상이 성공이라고 정해 놓은 틀을 향해 기어도 변속하지 않고 엑셀레이터만 밟아 댄다. 여기 신념이라는 고상한 말은 기억에서조차 아득하다.

스티브는 낡은 것을 지키기로 했다. 낡은 것이란 오래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이다. 할어버지가 신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상표의 부츠를 고집하는 일, 바닷 바람에 헛간의 페인트가 벗겨질 때마다 새롭게 페인트 칠을 하던 할아버지의 무의미해 보이던 행동은 뭔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바울에게 율법은 오래돼 낡은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하찮아서 낡은 것들이다. 그가 지켜야 할 것은 자신의 충실함이 아니라 하찮은 이들의 신념을 보호해주는 일이었다. 바울은 마침내 변절하고 전향한다.

전향이라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다. 우리가 지금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공무원들은 구조보다 높은 분들을 모시는 의전에 신경썼고, 구조대는 생명보다 예산에 신경썼고, 경찰은 정확한 진상규명보다는 정치적 파장이 권력자들에게 어떻게 유리하게 돌아갈까만을 고민했다.

인터넷을 떠도는 수많은 음모론이 그럴듯하면서도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만약 사실이라면 누구 하나 자기 삶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 할 터인데 그런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전향하고 권력을 배신하여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한 사람이 없는 건지 아니면 말못할 원인이 처음부터 없던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분명히 뭔가가 있는듯한데 누구도 말하지 않는, 자기 하나 다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하찮게 만들어 버린 그 진실로부터 전향할 사람이 없는 현실이 슬프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다면 우리는 불의와 개인의 안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냥 불투명한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다. 구원을 받기는 한건가?

바울의 전향은 깊이 따져들면 그를 본래의 위치로 돌려 놓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본래의 위치로 방향을 바꾼 그는 전향을 개인의 감정적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고 알랭 바디우가 말한 것처럼 진리 사건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는 복과 흥에 겨워 “예수님 찬양” 복음 성가를 불러 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대 세력인 로마와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로마가 가진 화려한 제도와 철학에 대항하여 하찮은 것들을 데리고 싸움을 시작한다.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 진리로 승화시킨 바울의 전향이야 말로 비겁한 변절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첫 걸음이었다.

스티브의 미래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인생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스티브는 주저주저하며 표현 못했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하여 앨리스의 집을 찾는다. 도시로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니라 그를 만들었던 고향과 같은 마을에 머무는 회귀적 선택을 한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전향은 배신도 회심도 아닌 본래로의 돌아감이다. 성경은 그것이 본래 계획되어 있었던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 삶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약속의 땅을 향해야 할 터인데 약속의 땅은 천연가스로 얻게 될 황금의 땅이 아니라 잊고, 잃고 지내던 것들의 가치가 살아있는 땅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라는 음성을 듣는 일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 1:4, 새번역)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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