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의 법칙은...없다!
바라봄의 법칙은...없다!
  • 강만원
  • 승인 2014.05.23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 <미주뉴스앤조이>  
 

바라봄의 법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음에 큰 뜻, 이른바 큰 욕망을 품고 대상을 바라보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을 이룬 대표적인 성경 인물로 아브라함을 꼽으면서, 다음 문장을 성경의 뚜렷한 근거로 제시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4-17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더불어 조용기의 '바라봄의 법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을 호도하며 타락한 기복 신앙으로 이끄는 대표적인 견인차이다. 긍정하는 삶, 그리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삶을 두고 무턱대고 세속의 욕망이나 탐욕으로 몰아붙이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서 의미를 살펴보면, 바라봄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상관없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공을 강조할 뿐이다. 바라봄의 법칙을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는 자들의 섣부른 주장에서 우리는 심각한 성경적 일탈을 발견한다.

바라봄의 법칙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성'에서 벗어나서, 소위 '고지론'과 함께 인간의 세속적인 탐욕을 부추키는 번영신학을 정당화시킨다. 만약에 성경의 본문이 실제로 '바라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이성의 반론을 뒤로 한 채 오롯이 따르는 것이 바른 순종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은 이성의 확인 이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과 더불어 이른바 바라봄의 법칙을 이루는 다른 문장의 배경과 문맥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근거는 그가 사사로운 욕망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넓고 기름진 땅을 바라보면서 탐욕의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옥한 하란 땅에서 이미 세상의 재물과 사회적 자산을 넉넉히 소유한 아브라함이 모든 기득권과 욕망을 버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믿음의 험란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 1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동사의 시제에 주목해야 한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 보여주신 땅을 바라보며 육적인 욕망을 좇아 길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여 줄' 미지의 땅을 향해서, 다시말해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씀에 의지해서 먼 길을 떠났을 뿐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아브람이 땅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품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휘둘러 보매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물의 욕망을 버린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를 산에 오르고 주위를 바라보라고 명령하시자 주저없이 순종했던 것이며, 온전히 순종했던 그에게 기름진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언약'을 주신 것이다.

다시말해 아브람은 탐욕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지 않았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즉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시점은 조카 롯에게 비옥한 땅의 선택권을 주고 자신은 척박한 땅에 홀로 남아있던 때였다. 기름진 땅에 사사로운 욕망이 있었다면 그는 롯에게 땅의 선택권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욕망이 아니라 순전한 희생과 깨끗한 재물관을 보시고 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 아니라, 지독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 그대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그는 가나안에서 비옥한 땅을 소유한 주인으로 호사스럽게 살았던 것이 이 아니라, 가족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 '막벨라 굴'을 가까스로 소유했을 뿐이다. 요컨대 그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세상의 크나큰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며, 그에게 바라봄의 법칙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탐욕의 주술에 지나지 않는 '바라봄의 법칙'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순복음 교단의 조용기 목사가 설교에서 말하듯이, "세상의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큰 뜻을 이루며, 부자를 꿈꾸는 자, 그리고 대형 목회를 꿈꾸는 자라야 크게 성공할 수 있으며,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 '루저들'이다. 거지 밥통이나 바라보며 늘상 초라하게 사는 자는 끝내 거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저주서린 주장은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주의 거룩한 교훈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단의 타락한 사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축복을 위해서 오직 '순종의 법칙'이 존재할 뿐이며, 성경에 존재하는 유일한 바라봄의 법칙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는.., "예수 바라봄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