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누가복음 9장 예수의 수난예고
영화 '명량'과 누가복음 9장 예수의 수난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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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2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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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최병학의 문화로 본 성서]

1. 예수의 수난 예고

누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나옵니다. 9장 22절과 44절 두 구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벳새다(고기잡이의 집) 빈들에서 5병2어로 굶주린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이후 따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는데, 예수님의 그 질문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다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9:22).” 굶주린 백성을 배불리 먹이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 받으신 후,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 구세주의 길은 ‘남을 위한 죽음의 길’임을 역설한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44)”는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2).”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나,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임’, 곧 ‘타자를 위한 삶과 죽음인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고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58)”는 그런 수난 전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말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장벽 앞에 있는 이의 ‘고독’을 영화 <명량>(김한민 감독, 2014)의 이순신 장군을 통해 읽어 낼 수 있습니다.

 

2. 영화 <명량>은 명랑하지 않았다.

영화 <명량>의 소재가 되는 명량해전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이 울돌목(명량해협)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함선은 333척)을 물리친 조선 전사에 빛나는 해전입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다른 해전과는 다릅니다.

23전 23승의 승리가 보여주듯, 거의 대부분의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을 물리칩니다. 그것도 100년간 내전을 치른 ‘전쟁 귀신’과의 싸움에서 말입니다.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20일 만에 마라톤 하듯 한양까지 치고 올라간 이들입니다. 이후 300여년이 지나, 1910년 8월 29일에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고(일본에서는 ‘일한합방(日韓合邦)’으로 부르고, 한국학계에서도 ‘한일합방’으로 불려지지만, 이는 대한제국이 자유의사로 나라를 합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에 적합하지 않다), 100여 년을 더 지나 현재는 ‘집단자위권’(집단자위권이란 현재 일본 헌법해석에 따르면 자국이 공격받았을 경우에만 군사적 반격을 가할 수 있으나, 이를 수정해석하여 자국의 동맹국이 공격받았을 경우에도 군사적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평화헌법 제 9조에 나오는 ‘전쟁, 교전권, 군대보유를 부정한다’는 조항은 무의미해진다. 지금 평화헌법은 일본이 전후 제국에서 보통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일체의 무력사용을 사실상 봉쇄당한 것인데, 집단자위권의 재해석으로 향후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의 신호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 해당되는 베트남,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은 일본 재무장에 찬성하고 있다)을 수정해석하여 군사적 행사권역을 넓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때 이미 조선의 왕 선조임금은 백성을 따돌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최악의 위기 속, 절대 열세의 전력으로 백성들이 7년을 견딘 임진년의 왜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판옥선 1척도 잃지 않는 전승불패의 신화를 남겼습니다.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판옥선(거북선 포함)과 화포의 위력,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이었습니다.

영화 <명량>은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30척의 일본 해군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에 선조 임금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습니다.
 
판옥선 12척으로 수백 척의 세키부네(關船)를 맞아야 했던 상황입니다. 심지어 경상우수사라는 자는 전쟁을 앞두고 탈영을 하고 임금은 “일이 다 그른 것 같으니 때려치우고 육군에나 합류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묵묵히 전투 준비에 몰두합니다. 명량대첩 직전 날인 1597년 음력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라고 하며 울돌목으로 배를 몰았던 것입니다.

김훈의『칼의 노래』를 보면, 명량해전을 앞두고, 모순된 세상 앞에 놓인 이순신 장군의 독백이 나옵니다. “이 방책 없는 세상에서 살아 있으라고 칼은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영화에도 보면 “신에겐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호기로운 문장을 써내려 가던 그 순간에도, 피로와 쇠약함 때문에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아야 했던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대책 없고, 의미 없고, 보람 없는 세상에 불안과 고독을 안고 전장에 나서는 이순신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승리의 해전인 명량은 결코 명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이 결코 ‘부활의 승리와 기쁨’만으로 잊혀질 성질의 수난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하는 길인 것처럼 그리스도 신앙 역시 물질적, 영적 축복의 명랑한 길이 아닌 것처럼 말이지요.

3. 세월호 침몰과 장군선을 구하는 백성

영화에 왜선을 급류로 끌어들여 싸움을 벌인 뒤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급류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입니다. 이 때 영화는 백성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급류를 빠져나오는 장군의 대장선의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 장면에서 객석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하였지만, 백성(아니, 어린 학생들)이 침몰하는 배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며 죽어가는 ‘세월호’와 영화 <명량>에서 소용돌이에 빠져가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구조하는 ‘어선 속 백성들’을 보며 씁쓸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씁쓸함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군사들의 말을 통해 비통함으로 다가옵니다. “후손 아그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했는데 이걸 알까?”

요즘 김보성(과 더불어 개그우먼 이국주)의 ‘의리’가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은 ‘의리’ 때문에 싸운다고 말하며 장수의 의리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장수의 의리는 충이다.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임금이 있다.” 영화 <명량>의 흥행에서 우리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백성)는 이(利)를 위하더라도 지도자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사생활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은 백성의 목숨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량>의 흥행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없는 지도자를 갈구하는 자기 이(利)를 구하는 백성들의 양면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의 음성을 이순신 장군의 입을 빌어 읊조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24).”

최병학 목사 / 남부산용호교회,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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