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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드리머-꿈을 향해 달려가다

기사승인 2017.04.14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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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레사 리의 담대하고 멋진 삶 엿보기(상)

테레사 리는 드림 법안의 단초가 된 사회 운동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오리지널 드리머(Original Dreamer). 사람들은 테레사 리(34세)를 이렇게 부른다. 우리에게 드림 액트로 알려진 이 법안의 원래 명칭은 ‘미성년 이민자를 위한 성장, 구제, 그리고 교육(the Development, Relief, and Education for Alien Minors)'.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드림(DREAM).

어린 나이에 부모 따라 미국에 와서 자신도 모르게 서류 미비자가 된 청소년을 구제하는 드림 법안. 이 법안에 적용되는 미성년자를 우리는 드리머라 부른다. 테레사는 이 법안 발의의 단초가 된 서류 미비자 청소년이었다.

테레사는 현재도 꿈을 향해 달려간다. 이 법안이 처음 상정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아직 의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그녀는 지금도 서류 미비 이민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녀의 상황은 16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어머니이며, 맨해튼 음대에서 박사 과정 중이고, 음악 교사이며, 사회 운동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 이상 서류 미비자가 아니다.

그녀를 만난 곳은 이민자 보호 교회 운동 심포지엄이 열렸던 후러싱제일교회였다. 미리 인터넷에서 조사한 앳되고 가녀린 모습이 아니었다. 딸을 출산한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부기가 빠지지 않은 모습이 안쓰러웠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몸을 좀 더 추스르고 행동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같은 엄마로서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한국에 가본 적이 없지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한국말을 꼭 해야 한다고 해서 배웠어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태어나 2살에 미국에 온 테레사는 유창하진 않지만 조리 있고 분명한 우리말을 사용했다. 그녀의 부모는 다른 수천 명의 이민자와 함께 한국전 이후에 분단된 조국을 떠나 남미로 갔다. 브라질에서 세운 의류 사업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했으나 한 친척이 아버지의 사인을 위조한 체크 북을 이용해 은행 예금을 모두 인출했다. 결국 아무것도 없이 어머니의 결혼반지를 팔아 미국에 왔다.

테레사와 가족은 몇 달 동안 뉴욕 브루클린 아파트에서 살다가 시카고로 이사했다. 시카고에 와서도 힘들었다. 임차한 아파트 지하는 비가 올 때마다 물이 넘쳐흘렀고, 벌레와 쥐도 있었다. 침대와 가구도 없이 한동안 해먹을 달고 생활했다. 배도 고팠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는 종교인 비자를 신청하려 했으나 청원서에 서명할 신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아빠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고, 서류가 거짓으로 통과되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테레사 가족의 비자는 결국 만료됐다.

그렇게 서류 미비자로서의 삶이 시작됐고, 테레사는 6~7살 때쯤 아버지에게서 서류 미비자에 관해 들었다.

아버지는 “누구라도 우리의 신분 상태를 알면 우리 가족은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가는 곳마다 공포가 따라 다녔다. 차를 타고 가다가 경찰이 지나가면 아버지는 똑바로 앉으라고 명령했다.

아버지는 테레사를 시카고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다. 테레사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포함해 철자 맞추기 대회, 과학 박람회 등 많은 이벤트에 참가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녀였다. 유치원부터 8학년까지 학교를 하루도 빠진 적이 없었던 테레사에게 학교는 8학년을 마칠 때 개근상으로 장학금을 수여했다.

저축 채권(savings bond). 소셜 시큐어리티 넘버도 없고, 저축 채권을 현금화할 수 있는 은행 계좌도 없었다. 서류 미비자라는 의미를 정확히 몰랐지만 단지 미국 시스템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무가치한 상일 뿐, 아무 의미도 없었어요.”

아버지는 그 채권을 찢어버렸다.

조금이나마 서류 미비자는 누구인가 하는 인식을 하게 된 계기였다. 운전 면허증은 물론이고 정부가 주는 상이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현실. 건강 보험도 없고, 합법적으로 직업을 가질 수도 없다. 어쩌면 대학을 갈 수도 없을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테레사는 선생님, 경찰, 친구 등이 자신의 처지를 물어볼까 봐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신고해서 가족과 헤어지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브라질로, 부모는 한국으로, 시카고에서 태어난 동생은 포스터 홈으로 가야 했다.

“우리는 이곳에 고정됐어요. 갈 곳이 없었습니다.”

테레사는 친한 친구조차 무서워하며, 매우 조용하고 고립된 채로 자랐다.

테레사 리가 지난 6일 후러싱제일교회에서 자신의 삶과 드림 법안에 관해 이야기 하기 전 연주하는 모습

단 한 가지. 그녀를 자유롭게 하는 것, 음악이 있었다.

일곱 살에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침대도 가구도 없던 집에 부유한 여신도가 방문해 가구와 피아노를 선물했다. 음악 교사 없이 하루에 2~3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 삶이 피아노에 달린 듯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8세에 아버지 교회에서 반주하기 시작했고, 학교 합창단 반주도 했다. 인형 놀이에 바쁠 나이에 테레사는 매주 찬송가를 외우고 주일 예배에서 반주하는 라 바빴다. 때때로 레슨을 받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지속해서 비용을 부담할 여유가 없어서 자주 그만둬야 했다.

테레사는 15세까지 거의 독학하다시피 피아노를 했지만, 지역과 주의 여러 클래식 피아노 대회에 참가해  많은 상을 받았다.

1998년 크리스마스 시즌. 테레사는 고등학교 콘서트에서 합창단 반주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자동차가 남동생을 쳤다.

테레사의 아버지는 병실에서 가족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아버지는 경찰에게 아들의 잘못으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비록 동생을 친 차량의 운전자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과속 운전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테레사 가족은 수천 달러의 병원비를 지급해야 했다.

“그 순간 정확히 깨달았어요. 서류 미비자라는 것은 단순히 하루하루를 공포에 시달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서상희 tsang2000@newsnjoy.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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