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서른 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 김영웅
  • 승인 2017.07.07 01: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로부터 얻은 공감

화창한 날이 다른 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여기, 서던 캘리포니아에는 "희망의 도시 (City of Hope)"라는 이름을 가진 병원이 있다. 그러나 이 좋은 첫 느낌은 이 병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완벽한 역할을 한다. 이 희망의 도시는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아닌, 그런 희망이 간절하게 요구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일하고 있는 City of Hope는 암 전문 병원이다.

 

커피 한잔을 위해 걷는 2분 거리에도, 커피를 기다리는 짧은 5분의 순간에도 매일 난 기쁨이 사라져 버린듯한 회색 빛의 앙상한 얼굴들을 만난다. 많은 이들이 모자를 쓰고 있지만, 그 모자로부터 삐져나온 머리카락은 보이질 않는다. 너무 말라 골격의 구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날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병원 냄새는 고독이고 슬픔인 것만 같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쳐 잠시 짓는 의례적인 웃음조차 내 마음 저변에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때론 그 웃음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조소도 담겨 있음이 느껴진다. 날 향한 것일까, 아니면 인생을 향한 것일까. 아,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어찌 그들의 아픔을, 그들의 마음을 십 분의 일이라도 공감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 죽음을 체감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은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여 그들의 눈을 어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었으나,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다 읽고 난 후 당장 난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서 조소만이 남아 날 매섭게 향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의 영역에 내가 침범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폴 칼라니티는 내가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준 것이다. 책 속에서도, 그리고 책 밖에서도 난 실제적인 죽음에 실제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하마터면 거기에 잠겨버릴 것 같은 기분에, 난 마시다 남은 커피를 얼른 손에 쥐고 밖으로 나왔다. 작열하는 캘리포니아의 태양도 마냥 좋았다. 자유함과 해방감을 느꼈고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을 체감하지 못하는 불능에 대한 한 사람의 미련한 감사일 뿐이었다.

죽음은 그 어떤 의사나 과학자의 노력도 결국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죽음은 한번도 인간에게 패한 적이 없다. 승률 100%. 궁극적 승리다.

이론적으로 깊게 안다고 해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그 실재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죽음을 이해하고자 죽음을 경험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죽음을 생생하게 느끼며,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지만, 일회성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반면, 불치병의 삶은 평생의 고통을 동반하며 죽음을 기다린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슬프게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의 방향은 죽음을 향해 있다.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그토록 많이 죽음에 대하여 읽고 연구하고 또 많은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며 그들의 죽음도 숱하게 목격했지만, 자신이 불치병에 걸려 버렸을 때에야 비로소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타인의 죽음은 죽음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거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토록 이해하고 싶어 수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하고 경험해왔던 죽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음에도, 그가 결국 맞이한 건 유레카가 아니었다. 혼란스러움이었다. 의사의 한계일까. 지식인의 한계일까. 아님, 인간의 한계일까. 기술의 허무함일까. 지식의 허무함일까. 아님, 인생의 허무함일까.

우린 생각한대로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따지다가 문제를 맞이하고, 또 생각하고 따지다가 그 문제를 해결한다. 생각하는 것은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인간의 속성이다. 우리 인간은 그저 알고 싶은 거다. 그러나 폴 칼라니티의 고백은, 앎의 기쁨의 끝이 혼란스러움과 연결됨을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예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나도 모르게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허무함의 철학으로 빠지지 않아야겠다며 내 안에선 어느새 자가 항상성 모드가 작동되지만, 인간의 지식의 끝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저 그렇게 한동안 멈춰있었다.

이 책의 저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폴 칼라니티라는 점은 슬픈 의미를 가진다. 그의 마지막 숨결을 그 스스로 담았기 때문이다. 죽어가면서, 죽음을 향해 다가가면서 그렇게 담담히 자신의 죽음과 그에 대한 의미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 나는 왈칵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은 슬픔을 느꼈다.

암이라는 손님이 폴을 찾아왔듯이, 원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슬픔은 우리를 찾아오는 법이다. 어느새 둥지를 튼 도둑 같은 슬픔은 언제나 달갑지 않은 선물을 들고 와 우리에게 조용히 건낸다. '고통'이라는 포장지 안에 담긴 '지혜'라는 선물이다. 우린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시기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기다렸던 폴은 아마도 글을 쓰는 동안 더 지혜로워졌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죽음 앞에 선 지혜이지만, 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지혜가 담긴 글은 나에게도 그랬듯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며 우리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고 있다는 점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오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그의 지혜의 어마어마한 파급력에 우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슬픔은 그 포장을 뜯지 않으면 고통이지만, 맘먹고 뜯어내기만 하면 지혜가 된다. 폴이 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써내려갔던 것은 바로 고통의 포장지를 뜯어내며 지혜의 과일을 먹어갔던 과정일 것이다.

슬픔도 슬프지만, 슬픔을 견뎌내는 과정은 더 슬프다. 견딤은 슬픔보다 더 슬픈 법이다. 불치병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그저 슬프기만 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니다. 거기엔 견뎌내는 과정이 포함된다. 과연 어떨까. 시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달아나는 그 기분은!

인생은 어쩌면 그 수만 겹일지도 모르는 고통의 포장지를 뜯어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고 인내와 사랑이 필요하다. 그나마 폴의 아내가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는 점은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면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견딤의 과정에서 "함께"가 갖는 의미는 평상시와는 분명 다를 것이리라.

오늘도 난 그들을 마주친다. 그러나 오늘 난 그들의 눈을 일부러 마주치고 웃음을 짓는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나를 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다른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오늘은 유독 눈에 띈다. 그것이 얼마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다행스럽게 여기게 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늘 "함께"라는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와도 같은, 그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아픔과 최후의 죽음까지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 발가벗겨진 그들의 실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간들을 묵묵히 함께 하는 사람들. 그 소중하고도 소중한 사람들. 난 이들에게서 희망을 느낀다. 함께 함은 소중함이고 그 소중함은 희망과 닿아 있다. 죽음 그 바로 옆에 희망이 있다. 난 City of Hope에 있다.

책을 다 읽고 맘이 휑하게 텅 빈 듯 했지만, 내게 뭐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음을 감사한다. 오늘따라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인다.

 

(글을 쓴 김영웅씨는 현재 City of Hope 병원의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올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