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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불안함과 영원, 새로운 길을 걷게 하는 신비한 힘

기사승인 2017.09.10  0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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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리뷰] 극단 바람처럼의 유리디스

영화 유리디스 포스터 (ⓒ 유리디스)

"사랑에 고픈 자가 사랑을 깊게 알고, 사랑을 알면 약자가 되는 법이야" 친구와의 전화통화 중에 뱉었던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깊이 할수록, 약자가 되는 쪽은 언제나 깊이 사랑하는 쪽이었다.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조건을 맞추고 취향을 따라하며 그 사람의 결에 맞춘다. 그러다 문득,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에게 맞춰 내가 변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강자가 약자가 되고, 약자가 강자가 되는 힘, 나를 잃어가는 것 같으면서도 나를 찾아가는 힘, 이분법적인 논리가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세상과 조화를 이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사랑이 가진 힘이자 역설이다.

연극 '유리디스'는 장 아누이의 '유리디스'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작품으로 삶에 있어 궁극적 지향과 이상인 '사랑'에 대해 말한 연극이다. 극을 찬찬히 살펴보면 실존주의 문학과 철학에 기반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극은 프랑스 작가 카뮈(Albert Camus, 1913-1960)와 프랑스의 실존주의 사상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문학들과 겹치고 독익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의 사상들이 접점으로 만난다. 실존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보편적, 객관적 관념으로써의 설정 거부), 흐름(존재 그 자체에 중심을 두며, 기존에 있던 존재론과 다른 존재자로써의 의미)과 가치(자유와 책임의 주체성)을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사르트르가 갖고 있는 즉자(존재 자체, 사물)와 대자(의식) 사이의 시선이라는 구조를 통해 사랑이 갖는 상호주관적인 의미, 자유와 책임, 역설, 등등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다.

연극의 내용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극은 열차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도착한 곳에서 독특한 캐릭터와 평범한 캐릭터가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지극히 평범한 관습과 시선이 독특성으로 표현되고, 극 중 주체성을 지녀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는 주인공들은 평범한 옷을 입음으로 극이 말하려는 의미 즉, 각 존재의 독특성은 또 다른 평범성이며, 기존에 관습과 생각은 각 존재가 볼 때 독특성을 지닌 것이라는 내용을 부각한다. 먼저 극은 남주인공인 오르페와 여주인공인 유리디스의 상황을 설명하며 전개를 준비한다.

오르페는 아버지와 함께 악기 연주로 근근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의 자유를 누리고 자신을 표현하며 삶을 개진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기존에 통념에 삶의 주체성이 막혀 슬퍼하고 있는 남성이다. 이와 다르게 유리디스는 유랑극단의 배우로써 같이 일하는 가족, 단원들의 일반적 통념과 관습에 맞서 존재자로써의 자유로운 삶을 개진하고자 하는 여성입니다. 때문에 존재가 아닌 '어떠함'을 보는 단원들에게 '바보', '이상하다'라는 말을 들으며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 이 둘의 유사성은 둘의 첫 만남 시 운명의 사랑을 마주하게 되는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오르페의 바이올린에 담긴 존재의 음성과 유리디스가 가진 무언의 음성이 서로의 마음을 감응케 하고, 만남으로 이어져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둘에게 벼락처럼 찾아온 사랑은 존재 그 자체를 보게 하고, 사랑해야하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그 과정 속에 유리디스가 보여주는 행동은 즉자와 대자 사이의 갈등 즉, 존재 자체로써의 사랑과 존재가 지닌 어떠함, 인식으로의 사랑을 대조하며 오르페와의 관계를 설정합니다. 유리디스가 보여주는 기이한 행동과 말들, 다면적인 자신의 표현은 존재와 어떠함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랑을 설명한다. 사랑이 어떠함이라는 부제를 지니게 되면 파국으로 끝날 것이고, 존재를 사랑하게 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을 말이죠. 오르페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겠다는 다짐으로 유리디스와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재밌는 건 사랑이 지닌 역설이다. 처음엔 오르페가 사랑의 약자로써 유리디스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유리디스는 오르페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존재가 어떠함으로 속박될 수 있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사랑이 지닌 변증법적인 관계가 주거니 받거니 지속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유리디스와의 만남 이후, 새로운 삶을 발견한 오르페는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나겠다는 용기를 얻는다. 그동안 자신을 속박하는 아버지는 오르페의 어떠함 즉, 바이올린을 잘 켠다는 것과 젊고 어린 외모로 인한 열매를 좋아하는 세속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자의 관계를 재고하며 이별을 고하고 자기의 삶을 위한 도전을 자유롭게 개진한다. 여기서 대조되는 또 다른 측면이 유리디스와 오르페의 사랑을 통한 새로운 삶으로써의 개진과 대비되는 유리디스의 전 연인의 자살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담론은 기존에 우리가 갖던 의미로써의 통념들을 뒤엎도록 만드는데, 죽음과 삶이라는 측면에서의 사랑이 과연 무엇인가? 사랑은 존재로서의, 어떤 특정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자아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노마디즘(nomadism)인가? 톨레랑스(tolerance)인가? 고민하는 단초로 제공된다.

여기서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된다. 2막은 남, 녀의 정사로 시작된다. 여기서 두고봐야하는 것은 '소유'와 '기억'이라는 지점이다. 1막에서 유리디스를 둘러싼 지인들의 '소유'적인 언어가 지니는 폭력성에 질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녀 간의 정사가 사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어긋남을 지니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사랑의 즉자와 대자간의 관계 구조를 말해주기도 하는데, 오르페는 정사 이후, 이전에 쓰지 않던 소유의 언어 즉, 내 것이다. 나는 널 안다. 너는 내 졸병이고, 나는 대장이다 등등의 말을 하면서 타자의 시선으로 오르디스에게 소유의 폭력을 가하는 걸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기억이라는 측면 즉, 현존의 새로움을 거부하고 과거의 어떠한 행적, 비관적이고 추한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오는 폭력에 있어 대조된 오르페와 유리디스의 모습은 둘 사이의 사랑이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추가적으로 정사 이후에 격식을 차리는 남성과 격식을 거부하는 여성의 모습도 1막에서 예고된 사랑이 아닌 유리디스가 거부하는 사랑을 나타낸다.)

2막의 마지막으로 유리디스는 즉자와 대자 사이의 사랑의 구조가 지닌 힘으로 약자가 되고, 처량해지는 것을 무서워하여 떠나게 되는데, 그 과정 중 죽음을 맞이한다. 그 사실을 안 오르페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3막이 시작되면서 오르페는 끔찍한 천사 앙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사랑의 힘이 기존의 관념으로 형성된 죽음과 삶의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임을 설명한다. 오르페는 사랑이 지닌 힘 즉, 주체적으로 존재를 사랑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수치, 고통, 죽음을 껴안는 진정한 사랑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이 갖고 있는 부조리 속에 불안을 말이다.

 

유리디스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오르페는 끔찍한 천사 앙리의 도움으로 죽은 유리디스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대화하며 사랑이 갖는 어려움 즉, 즉자와 대자라는 인간의 부조리 속에 각 존재가 맺는 관계 속 불안과 어려움, 하나가 되고 싶지만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존재로써 살고 싶지만 사랑으로 누군가의 시선과 인식에 맞춰지는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여기서 두 주인공의 대조는 사랑의 낙관성, 보편성, 본질을 부각시키게 만드는데, 오르페는 비관으로 일관하는 사랑의 어려움과 소유로써의 사랑을, 유리디스는 그것을 넘어 함께 할 수 있다는 낙관과 존재로써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둘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4막은 2-3막에 대한 해설의 장으로서 그동안 전해왔던 사랑에 대한 담론과 구조를 재확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리디스가 무서워했던 '앎'과 '소유'로써의 사랑, 그것이 지닌 폭력성과 사랑하기에 존재를 감춰야하고, 꾸며야 되었던 약자의 모습, 보편적 가치 기준에 부합하지 않지만 각기 다른 존재의 눈으로 다채로워지는 존재의 다면성과 그것을 묶는 현존은 유리디스가 죽는 과정, 즉 울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편지를 보내는 유리디스의 모습과 편지 속 내용이 담고 있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통해 나타내려는 존재의 불안감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려는 주체성과 자유의 용기를 존재의 음성이라는 측면으로 해설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오르페는 유리디스가 보여줬던 사랑의 모습을 따라 사랑으로 열었던 새로운 세계를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기존에 갖던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서는 주체적 의미로써 지녀 유리디스를 만나러 감으로 극은 마무리를 짓는다.

극은 사랑이 가진 다면성 즉, 힘의 구조와 불안, 시선과 폭력, 강자와 약자, 상호주관성과 새로운 의미, ‘노마디즘’으로의 사랑을 극 중 관계들을 통해 끊임없이 고찰하도록 이끈다. 다양한 상징과 주인공의 어투, 미묘한 표정 변화와 대화의 소재, 대조되는 성향과 새롭게 부딪히는 상황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전달하게끔 만들어 깊은 잔향을 남긴다.

다만 너무나도 많은 내용을 두 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전달했어야 됐기에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고 변하는 사건의 구조는 관객들의 참여로부터의 의미와 사랑이라는 것을 다루며 전달하려는 큰 주제를 부각시키기 어렵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한다. 사랑의 힘을 전달함에 있어 상호주관성의 원리와 서로 간의 세계가 교차되며 사랑의 구조가 지닌 불안과 뛰어넘는 영원으로의 상상을 하게끔 긴 호흡과 빈 공간이 필요할 텐데, 급하게 내용이 전개되다보니 내용의 고찰과 의미가 투과되어 새로운 의미로써의 노마디즘이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마치 오르페가 보였던 강자로써의 사랑의 모습을 강요당한 것 같은 느낌이 마음 속 깊숙하게 남았다.

또한 관계라는 대조로 더욱 넓어져 삶과 죽음이라는 측면에 의미를 다룬 것은 좋았지만 형이상학적 의미를 지닌 영원으로써의 사랑이 죽음 이후에도 가능한 것인가? 라고 되물었을 때, 형이상학적이기에 응답할 수 없고, 그러면 결국 어떤 신화적인 내용이 인간에게 잠재되어져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랑의 의미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측면(죽음과 삶, 고통과 행복에 대한 담론의 엄밀한 정의에 따른 실존적, 현존 의미 투과와 영원으로써의 상황적 해석과 역동성으로써의 특별성)이 있기에 정확한 의미의 정의를 내린 다음 극이 전개되었다면 훨씬 더 의미에 부합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각자의 삶에 있어 결론부에 오르페와 유리디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구별을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구별이 정당한가? 질문할 수 있다. 그들도 어찌되었든 각자의 삶을 개진하고 있으며, 그 자유와 책임을 나름대로 지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을 나쁘다고 말하며 현실을 상징하는 아버지를 욕할 때, 그 나쁨 속에는 가치판단과 기준이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소유와 폭력의 사람을 향한 배제를 보인 오르페와 유리디스가 정말 존재로써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도 과연 영원으로써의 사랑인가? 존재로써의 사랑인가?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면 자신의 원수가 지닌 삶의 문법과 결을 그대로 안으면서 그 폭력에 존재를 내어주는 사랑이어야 되지 않는가? 거기서 도망가며 존재로써의 사랑을 받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없으며 영원한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역설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극은 사랑의 낙관성을 말하는데, 형이상학적인 사랑의 의미를 제거한 인간의 현존 즉, 인간이 지닌 부조리함은 영원과 상치될 수 없는 개념 아닌가? 그것은 꿈꿀 수 없는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라는 마약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사랑은 불가능한 개념이며 영원을 꿈꾸지만 계속적으로 실패한다는 비관으로 치닫는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지만 연극 유리디스는 기존에 내가 갖고 있는 수없이 스쳐간 인생과 삶의 문법들, 그리고 내 존재의 불안과 부조리를 직시하게 만든다. 그렇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에 완전하게 동의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가져오는 삶의 다채로움에, 새로운 의미 부여에, 아니 이 모든 것을 넘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새로이 고민하게끔 만들었다. 사랑이 가진 알 수 없음, 그러나 그 속에서 무한히 갈망하는 존재의 사랑 고픔, 그것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과 세계를 통찰하고 느끼게 하는 신비한 힘 아닐까?
 

글쓴이 이진호는, 일상과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일상 가운데 교회가 되고 싶고 교회로 살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입니다.

이진호 leejinho54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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