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지역 박근혜 퇴진 운동의 역사
LA 지역 박근혜 퇴진 운동의 역사
  • LA 시국회의
  • 승인 2018.03.13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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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퇴진 1주년을 맞아

박근혜씨가 취임한 해인 2013년 5월 박근혜가 LA를 방문하자 이에 분노한 몇 명의 활동가들이 영사관 앞에서 박근혜 반대집회를 열었다.  이 때 참석한 활동가들은 제임스 오, 송유하, 임수빈, 종매, 그리고 크리스 김이었다.  이들은 한 시간 동안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인 윌셔 거리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각 언론사에도 집회 사실을 알렸지만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외로움 싸움이었다. 그러나 고국을 포함한 전 동포사회에서 박근혜 퇴진의 가능성을 알린 첫 집회였다.   

지난 2013년 김무성 의원이 LA 한인축제 그랜드 마샬로 참석했을 때 LA 시국회의 회원들이 '박근혜 퇴진' 만장을 들고 뒤따르고 있다.

그 해 6월 부정선거 규탄과 박근혜 퇴진을 위한 집회가 LA 총영사관 앞에서 열렸다. 특별한 주최 없이 공지된 집회였지만 70여명이 참석했다. 주최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나꼼수 이후 조직화된 새로운 얼굴들의 유권소, 내일을 여는 사람들(LA 노사모가 전신, 이하 내여사),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를 방문했던 사람들을 모으면서 시작한 사람사는 세상(사사세) 등이 주축이 된 집회였다. 어느 시민운동에서나 있는 일이지만 운동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진 단체가 있는가 하면 막 조직되어서 열정만 가득한 단체도 있었다. 그 동안 LA에서 활동하는 여러 진보 단체 중에 한국의 정치 이슈에 대한 활동은 내여사의 몫이었는데 한국 정치 상황에 관심을 가진 단체가 여러 개 생겨나면서 갈등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부정선거 이슈에 대해서는 '진실성'문제로 반대 의견을 내는 단체에서부터 열정이 너무 앞서 다른 단체와 보조를 못 맞추는 단체까지 폭은 생각보다 넓었다. 게다가 오래 동안 통일 운동을 해온 단체들과 한국 정치 이슈에 초점을 맞춘 단체들간의 노선 갈등도 있었다. 몇몇 젊은 활동가들이 이러한 갈등을 조정할 연대 단체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LA 시국회의가 출범했다. 출범식은 신경민 의원이 LA를 방문해 강연을 한 뒤 현장에서 가질 계획이었는데 강연장소인 한인회관이 강연 시작 2시간 전에 장소사용을 불허해 거리에서 시국회의는 조직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절 국회의원 조차도 한인회관에서 수모를 당했다. 

LA 시국회의 초대 대표는 내여사의 대표를 오랫동안 역임한 제임스 오씨가 맡았다. 그는 함께 할 총무를 물색했는데 제임스 오씨의 경력 때문에 시국회의가 내여사의 다른 외피라고 생각했는지 초기에 타단체의 협조는 미온적이었다. 총무는 한예니씨가 맡았다.  

LA지역의 열정적 활동가로 알려진 오씨는 2주에 한번씩 한인타운에서 박근혜 퇴진과 국정원 해산 집회를 개최했다. 보통 7~10명이 모인 집회에 20여명 이상의 노인들이 몰려와 폭력과 폭언을 퍼붓는 수적 열세의 집회였지만 참석자들의 열정으로 집회는 계속되었다. 

갑자기 오씨가 시국회의 해산을 선언하고 나오면서 LA 시국회의가 출범 몇 개월 만에 위기를 맞게 된다. 대표직 사임이 아니라 시국회의 해체까지 선언하고 나오자 회원들이 반발, 결국 오씨만 시국회의를 떠났다. 아직도 그의 이런 결정의 배경을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갑작스런 리더십 공백 상태에서 회원들의 결속은 깊어졌고 그 해 12월 당선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해외 동포 종교인들의 참여를 조직해 냈다. 다음 해 2월에는 '종북'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불법정권 '종'식하고 평화의 '북'을 울리자는 종북 페스티발을 개최했다. 

시국회의의 활동이 전방위적으로 퍼져 나가자 또 다른 갈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내 이슈에 대한 활동이 겹치면서 활동공간이 좁아진 단체들의 반발이 갈등의 단초였다.  민주연대와 내여사 주축의 초기 회원들이 시국회의를 떠났고 이 과정에서 시국회의의 주축인 몇 명을 특정 모임에 참석시키면 안 된다는 치졸한 시도까지 있었다. 바로 몇 개 월전까지 동지였는데 말이다. 반면 시국회의 출범 초기에 미온적이었던 단체들이 시국회의에 속속 합류하면서 시국회의는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자 모든 활동은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으로 집중되었다. 세월호 활동가들이 새롭게 부각되고 기존 단체들은 세월호 운동을 지원하는 역할로 바뀌었다. 세월호 활동이 정치색을 띠어야 하느냐의 여부와 기존의 단체들이 세월호 활동에서 선도역할을 하도록 두는 것이 옳으냐의 논쟁까지 겹치면서 세월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생겨났다. 또한 한국 정국의 소용돌이 때문에 미주 전역의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까지 바야흐로 LA는 춘추전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 전국 조직을 표방하고 나섰던 희망연대 사사세의 LA지역 조직 무산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되려 시국회의의 활동 공간은 넓어졌다.   

한인 축제에 초대된 김무성과 나경원이 탄 오픈가를 따라다니면서 박근혜 퇴진 만장을 흔들던 일은 '시국회의의 올림픽 대첩'으로 기억되는 대 사건이었다. 보수 일색의 LA 한인 사회에서 수천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이 사건은 돌팔매를 맞을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시작했다. 이 소식은 뉴시스 통신을 통해 전 언론으로 타전되었다. 2년 연속 사람들이 즐기러 나온 한인 축제에서 '박근혜 퇴진', '국정원 해체'의 만장을 드는 일이 옳으냐의 반대 의견도 있었다. 연대 운동에서 반대 의견 개진이 탓할 일은 아니지만 당시 반대의 소리를 가장 높였던 이들이 박근혜 퇴진 이후 자신들이 퇴진 운동의 주축이었다고 공치사를 벌이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    

시국회의는 이남종 열사  백남기 농민  정원 스님의  추모제를 개최하였고 국정교과서 싸드 반대 등 집회를 주최하거나 연대했다. 또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K)와 연대하는 평화 행진에도 함께 했고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도 팔레스타인 단체들과 연대하는 등 그동안 LA지역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긴밀하고 친밀한 연대활동을 주관해 나갔다.  이런 활동들이 알려지자 MBC 다큐 팀에서도 연락이 왔다.(이 기획은 김장겸 사장 체제에서 엎어진 것으로 안다).

시국회의의 활동 반경이 넓어지자 후원금도 답지해 한홍구 교수, 김진향 박사, 박노자 교수 등의 강연회도 주최했고 당시 인기 팟캐스트였던 '전국구' 팀을 초대해  LA 지역 공개방송도 열었다.  

2016년 말 한국에서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거세지면서 LA 지역에서도 대규모 촛불집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똑같은 문제가 이곳에서도 제기되었다. 대중성과 동원력을 위해서는 정치색을 띤 단체가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시국회의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그 동안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해온 시국회의가 끝까지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과 넘겨주자는 주장이 맞섰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그 동안 연대 활동의 혜택(연대의 그늘 아래서 자신들의 단체 홍보에 열을 올리던)을 입었던 일부 단체에서 시국회의의 정체성을 시비걸고 나왔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촛불 혁명'의 성공을 위해 시국회의가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옳은지 시국회의 내부에서 토론이 왕성하던 시기에  튀어나온 시비였기에 더욱 의아했다. 

이런 의견은 토론을 통해 결정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시국회의는 개별단체일뿐인데 왜 연대단체라고 고집하느냐며 난데없이 감정적 싸움을 걸어왔다. (기존 단체의 이런 태도에 일찍이 환멸을 느낀 사람 들 중에 시국회의에만 적을 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별 단체의 성격도 있었다).  시국회의의 연대 아래서 함께 운동하던 이들이 시비를 걸어온 이유는 퇴진 촛불 집회라는 인기 '아이템'에 편승해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 보겠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2016년 말 LA 지역에서 열린 몇 번의 퇴진 촛불 집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차(한국에서 퇴진 촛불집회가 본격화된 이후를 기준으로)는 시국회의가 주최했으나 2차부터 시국회의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자 지원으로 역할을 바꿨다. '혁명'이 중요한데 주도권으로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 말려 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국회의가 부각되었을 경우 여타 단체들의 비협조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최가 갈려 집회가 이곳 저곳에서 열렸을 때의 꼴불견을 막기 위한 LA 시국회의의 대승적 양보가 크게 한 몫 했다. 

시국회의에만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은 이제 정권도 교체된 마당에  더 이상의 활동보다는  학술운동 등에 전념하기 위해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LA 시국회의도 해체되었다.  박근혜 구속 직후에  LA 시국회의 활동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된 것만으로 만족한 시국회의 측은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한국의 촛불 시민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자는 여론이 있듯이 LA 지역도 승리의 주역은 참여한 일반 교민이기에 시국회의가 승리의 공간에서 조용히 물러나는게 맞다. 그런데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LA 박근혜 퇴진 운동사에서 이게 모두 자신들의 공로라며 시국회의의 활동을 완전히 삭제하려는 시도가 있어 뒤늦게 나마 기록보존을 위해 이 글을 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기록 보존의 이유는 촛불 집회에 나온 활동가들이 아니라 4년 동안 고생한 이름없는 교민들에게 승리의 열매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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