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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막내 이야기

기사승인 2018.11.09  08: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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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수 목사의 [길거리 목사의 삶]

 

1. 권오복, 일본군에 징집되다

1924년생 권오복의 집은 농사를 지었지만, 낙동강 남쪽에서는 책이 제일 많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글 읽기를 좋아하는 집안이었다. 한문성경을 읽을 정도로 개화된 권오복의 아버지는 글을 잘 하는 덕분에 한일병합 후 행정구역을 편성할 때 일직면장을 맡으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내가 왜놈의 아전을 할 수 있느냐?”라며 거절했지만.

권오복은 전쟁 막바지인 44년 9월에 안동, 의성 사람 10명과 함께 일본 보국대에 징집되었다. 운산역에서 출발할 때 아버지는 서럽게 울었다. 징집병력이 평양에 집결하고 약 한 달 후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널 때 권오복도 서럽게 울었다.

7일 밤낮을 달려도 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만주 벌판이었다. 미군의 폭격 때문에 기차는 낮에는 서 있다가 밤에만 달렸다. 겨우 인구가 많은 지역이 가까워졌을 때엔 학병들이 탈출하기 시작했다. 권오복의 일행도 같이 가고자 했지만 학병들이 받아주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출신을 데리고 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탈출자가 많아지자 부대장은 모두를 집결시킨 뒤, 일본도로 탁자를 두 동강을 내며 '탈출하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겠다'고 경고했다.

2. 일본군에서 탈출하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했다고 해도 철도 주변에서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뿐이었고, 그 외의 지역은 여전히 중국군의 영향 아래였다. 권오복 일행은 부대가 형양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조선 사람은 일본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섞여 있어도 한눈에 표시가 났다. 하루는 중국 옷을 입은 사람이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어눌한 조선말로 '중경에 임시정부가 있으니 탈출하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그 말을 믿고 조탑의 구칠성, 쌍계의 배선두, 탑리산운의 이용득을 합해 7명이 소총과 식량을 마련해 탈출했다. 밤새도록 갔는데 날이 밝고 보니 부대가 주둔한 작은 앞 산을 돌았을 뿐이었다. 부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할 수 없이 산에 숨어 있는데 수색조가 탈출병을 찾으려고 난리였다.

다시 밤이 되었다. 서쪽으로 가야 했지만 발각되지 않으려고 일부러 동쪽으로 갔다. 본대는 3일을 수색하다 포기하고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다시 서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밤중에 매복하고 있다가 행군 대열이 끊어지는 빈틈을 타서 사흘만에 다시 서쪽으로 넘어갔다.

일행이 탈출한 지역은 일본군의 점령지역이었다. 일본군이 탈출자 명단을 배포했고, 그 동네 주민들은 얼마든지 그들을 신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그들을 신고하지 않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중국군에 들어가다

그들은 일본어도 모르고 중국어도 몰랐지만 권오복이 한문을 쓸 줄 알았기 때문에 필담으로 소통하면서 다녔다. 어느 민가에 가서 '조선인인데 일본군에서 탈출했다'고 설명을 하니 밥을 주었다. 그 집주인이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기에 한참을 기다렸더니, 중국군 지역 방위대원이 왔다. 자기네 부대로 가자는 것이었다. 일단은 탈출에 성공인 셈이니 안도의 숨을 쉬며 따라갔다.

처음 도착한 부대에서 같이 생활도 하고 일본군과 싸울 때는 같이 작전도 했다. 그러다 포로가 되기도 했다. 상급부대에서 감찰이 나올 때 포로가 있다고 하면 포상금을 주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여러 부대를 전전했다는 것이다. 어떤 성에서는 인질로 잡혀 당시의 군벌들에게 팔려 다니기도 했다. 노예로 팔렸을 땐 얼마간 노동을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고 나서야 중경의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상 임시정부에 와보니 얼마 안 되는 거리였는데, 중국군이 이들을 뺑뺑이 돌려서 6개월이나 걸린 것이었다.

중국은 일본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만 돌아도 전투를 하지 않고 도망다녔다. 관료도 지주도 국민당 정부도 모택동 군대도 모두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다니며 세월이 가기를 바랐다. 도망다닐 곳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쫓아다니는 일본군만 힘든 것이다. 중국인들은 때가 되면 일본인이 저절로 중국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고 느긋하게 버티고 있었다.

4. 임시정부에 합류하다

일본군을 탈출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임시정부까지 온 것은 김준엽, 장준하 선생 일행, 그리고 권오복이 속한 일행이 다였다. 권오복 일행이 도착한 시기는 한국인들의 임시정부 합류가 완전히 끊어진 때였는데, 임시정부 요인들은 농촌 사람들이 중국 6천 리를 뚫고 중경까지 온 것을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1940년 8월 기강에서 중경으로 옮겨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 원의 원조를 받았다. 요인들과 가족들을 위해 토교에 15년 기한으로 2천여 평의 땅을 샀다. 토교 동감 폭포 위에 큰 기와집 3채를 짓고 길가의 2층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

또 임시정부는 토교의 한인 청년들을 모아 일종의 보충대를 운영했다. 토교에 거주한다고 해서 '토교대'로 불렀지만 상설은 아니었고, 한인 청년들의 상황에 따라 임시편성했다.

1945년 2월 토교로 거처를 옮긴 권오복은 기독청년회관에 머물렀다. 이미 한국광복군 청년훈련반 교육을 통해 소위로 임관했기 때문에 토교대에서는 별도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편입되어 임시정부 청사를 경호했다.

기독교회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한필동 선생에게 영어교습을 받기도 했다. 조선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권오복은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토교에 오자마자 있었던 OSS대원 선발에 발탁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다음 OSS훈련에는 꼭 참여하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친미주의로 갈라져 있었다. 농촌 출신 권오복은 세상물정에 어둡기도 했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장준하가 1918년생, 김준엽이 1920년생, 권오복은 1923년생으로 제일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김구 선생은 어린 권오복을 지극히 아껴서 '백현'이라고 호를 지어 주었지만, 백범보다 나으면 안 된다고 어리석을 우(愚)를 써서 '백우'라고 정하고 평생 썼다.

5. 다시 대한민국으로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 고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상해로 가야 했다.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서 뗏목을 타고 가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깊숙한 내륙에 있는 중경에서 해안에 있는 상해까지, 양자강 2,400km를 뗏목으로 가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상해에 도착한 권오복은 특기할 만한 일을 겪는다. 박정희를 만난 것이다. 상해 광복군파와 일본군 출신 사이에 갈등이 있던 상황이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처단하자는 강경파와 그들도 조국 건설에 일원으로 동참시켜서 귀국시키자는 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걸 중재한 게 백범으로,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병들을 귀국 대열에 편입시켰다. 박정희도 광복군에 편입된다.

권오복은 45년 11월부터 상해교민관리소에서 요원으로 일했는데, 46년 6월, 관리소가 해체된 후에 고국의 땅을 밟는다.

고국에 돌아오니 임시정부에서 귀환했던 인사들이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져 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시골에서 겨우 글을 읽고 배운 권오복은 우파와 좌파의 극심한 대립 사이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본인은 특별한 소신이나 신념이 없는데도 정파 싸움에 휘말려서 희생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권오복은 복잡한 정세 속에서 정확한 정보 없이 행로를 결정지어야 할 상황이었다.

임정의 경호대장이었던 김동수 장군이 국방경비대로 같이 가자고 했지만 거절하고 8월 말쯤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임시정부 사진, 광복군 모자, 옷, 임시정부 명단과 주소를 적은 수첩, 휘장 및 배지 등을 전부 불태웠다. 낮에는 우익의 세상, 밤에는 좌익의 세상이었던 상황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이용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1970년 말, 상해에서 함께 귀국했던 이승주가 물어물어 시골에 묻혀 살고 있는 권오복을 찾아온다. 이승주에게서 들은 소식은 놀라웠다. 박정희가 상해교민수용소 시절 자신을 광복군으로 편입을 시켜주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해서 '독립유공자 표창법'을 제정, 권오복을 포함하여 관리요원 16명을 포상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아파트, 연금, 자녀 학비면제의 혜택도 주었다.

이렇게 막내 광복군 권오복은 독립유공자가 되었고, 사후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700번에 묻혔다.

다음은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기록이다.
권오복(1924. 5. 2 ~ 2007.12.18)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44년 9월 일본군 제44부대로 징집되어 중지(中支) 지구로 이동 중 호남상 형양(衡陽) 지방에서 탈출하였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총사령부 경위대(일명 土橋)에 편성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지성수 newsm@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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