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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 Control 딜레마를 통해 본 미국의 태생적 한계

기사승인 2018.11.28  05: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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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선거를 전후하여 연이어 터진 묻지마 총기 난사 사건들은 또 다시 미국의 총기 허용법에 근본적인 회의를 느끼게 합니다. 피츠버그 시너고그나 싸우잔드 옥스 뮤직바처럼 특별히 주목을 끄는 '대형' 사건이 아니더라도 총기에 의한 연간 사망자 수가 자살자를 포함하여 3만3천명에 달한다 하니, 미국은 Gun Control만 놓고 보자면 결코 안전하지 못한 '문명국가'란 비난을 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문명과 야만이 어설프게 손을 맞잡고 있는 듯한 이런 딜레마의 저변에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헌법이 있습니다. 개인의 총기 소지를 허용하고 있다고 믿는 헌법 제 2조("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의미의 미묘한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결국 미국이 독립국가로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배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궁극적으로는 물론 인간의 독립과 자유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개인과 개인 사이 나아가서 국가의 권한과 개인의 자유 사이 그리고 연방과 주 사이의 안전한 관계 내지 힘의 균형을 어떻게 보장하고 또 여하히 유지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완력이나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반되는 2가지 경우로 대별된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생존이 침해받을 때 방위하기 위한 것으로서 소위 '정당방위'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어 온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제 3자가 부당하게 곤경에 처할 경우 이를 돕기 위해 사용하는 무력 역시도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음으로써 자신의 유익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있는 힘이나 심지어 무력을 끌어다가 함부로 남용하는 경우로써 이는 당연히 정당하지 못한 힘이라 하겠습니다. 실은 바로 이런 부당한 폭력에 대해 자신을 방위하고 대응하기 위해 무력이나 완력을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힘의 사용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되는 셈이지요.

단순화하자면 무력이 가해자의 손에 들려지면 부당한 폭력이 되며, 피해자의 손에 들려지면 정당한 방위력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부당한 폭력이 없는 세상이라면 정당한 방위력도 굳이 필요 없겠지만, 불완전한 세상엔 언제나 부당한 폭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방위력 내지 억지력으로서 정당한 무력(Just Violence)의 사용 역시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 자체엔 눈이 달려있지 않기에 어느 것이 정당한 손인지 어느 것이 부당한 손인지 구별하지 못한 채 언제 어디서나 방아쇠만 당기면 매한가지로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또 때로는 정당방위의 명분하에 과도한 복수를 하게 되는 경우나, 어떤 연유에서든 묻지마 총질과 같은 무차별 살인 행각이 벌어지는 경우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당한 폭력이 되어 소위 '칼로 시작하여 칼로 망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헛갈리게 됩니다. 결국 무기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느냐(금지한다고 해서 100% 금지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아니면 허용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은 결국 총을 여하히 [컨트롤]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총을 쥔 인간의 마음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여하히 [컨트롤]하느냐 하는 문제라 하겠습니다.

해서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는 이런 방위권을 개개인에게 부여하지 않고 제 3자 즉 국가에 위임하여 행사하도록 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두고 있지만, 아무리 치안 체제를 잘 정비하고 공권력을 강화한다 해도 시간을 다투어서 자신을 방위하지 않으면 [미국의 시골 마을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더더구나] 목숨이 위태롭게 되는 경우나, 때로는 공권력 자체가 부당한 폭력 행사를 하는 경우엔 개개인은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차라리 개개인이 무기를 소지하여 스스로를 방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논리가 여전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Just War의 논리를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하지만 사실 역사 가운데 정당한 전쟁보다는 부당한 전쟁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위험한 것이지 무기가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사실 이 불완전한/불안전한 세상에서는 언제나 기본 생명권을 보장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 뿐인 인생을 살며, 한 번 밖에 없는 세상을 살기 때문입니다. 자연 재해만 해도 불가항력적일 때가 많은데, 사람들끼리 서로 안전을 위협하고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만행을 일삼는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중요한 인간의 기본권 문제 곧 안전의 문제를 보장하기 위해 개개인의 방위력 자체의 정당성을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국가가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할 것이냐, 또 양자를 어느 정도 적당히 혼용할 것이냐에 따라 총기의 개인 소지 여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달라질 것입니다. 절대 평화주의자들은 개인의 방위력 자체까지도 폭력으로 간주하여 저항을 하더라도 철저한 비폭력을 원칙으로 삼는 반면, 개인의 방위력을 가능한 한 충분히 확보하려는 이들은 개인의 총기 소지까지도 허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논리만 놓고 보면 양쪽 주장이 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만, 목숨을 일거에 몰각할 수 있는 총기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개개인에게 소지를 허용하는 것에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단적으로 형벌의 최대치에 해당하는 사형 제도마저도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하여 폐지하려는 마당에 그 극형에 해당하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총기를 개인의 손에 쥐어 준다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개인의 정당방위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총기 소지를 허용하는 것 말고 딱히 다른 대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총기 소지를 허용하자니 자위권을 넘어서서 상대방의 목숨을 몰각하는 극단적인 사태를 허용하는 것이 되어 버리니, 완전하지 못한 인간 사회에서는 선택지 자체가 이미 태생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딜레마가 불가피하다 하겠습니다.]

물론 헌법 제 2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란 국가가 태동하게 된 특수한 배경을 감안하여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출발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고 영국 왕실의 [조세]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여 독립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국가로서의 아이덴티티는 총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간인 개개인(militia)의 무장을 통한 독립전쟁의 승리 역사와, 개인의 생존권/치안권과 국가 공권력 사이의 불가피한 긴장이 잠재되어 있었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총기허용을 국민의 기본권에 포함시키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더 이상 그런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아도 될 만큼 군대와 경찰력이 안정적으로 정착한 현대 도시 사회에서 '민병대'란 전혀 생뚱맞고 낯선 개념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이런 [역사적] 특수성을 유지하는 대가로 작금의 묻지마 총기 사고와 같은 학살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면, 진작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여 더 나은 대안을 찾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 총기를 허용하는 큰 프레임은 그냥 두고서, 백그라운드 책을 의무화하거나 여행 금지자는 총기 소지도 금지한다거나(No fly No buy), 전시용 탄창 판매를 금지하는 등의 소극적인 보완책 마련으로는 이런 부작용을 통제하기엔 만시지탄이 아닌가 합니다. 이 때문에 총기협회(NRA)의 로비 자금이 결국 최종적인 결정권을 여전히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말끔히 가시지 않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국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보장하고 허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변의 핵심 이슈라 하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개인의 자위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또 개인의 자위권을 무작정 극대화한다면 타자의 권한과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어서 자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개인 간에도 결국 무기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결과가 벌어질 것입니다. 상대방이 자동 소총을 들고 있다면 나도 자동 소총 이상을 들어야 억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개인의] 자유란 개개인이 알아서 주장하고 지켜야만 하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리고 그 자유가 침해받지 않도록 늘 긴장하고 경계하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래서 여차하면 상대의 자유를 저지/침해할 수 있도록 총기 소유를 허용하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얼른 보면 당장은 자유가 확보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 이면의 비용을 생각하면 자유가 확대되는 측면보다는 도리어 그만큼 부자유가 확대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도 상호 신뢰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와 안식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불신과 경계를 바탕으로 하는 긴장과 불안 내지 공포가 그만큼 확대되는 것은 아닐까요? 한 마디로 나의 자유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한 총기 소지가 도리어 나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한한다면 굳이 총을 소지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폭력이 지니는 이런 나선형 악순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비폭력을 선언하고 이 순환의 고리를 차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주의' 내지 '평화주의' 사상이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사의 반전사로 기록된 것은 바로 이런 불변의 진리를 차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의 기저에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코 덕스러운 훈화나 이상향을 향한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라, 바로 불변의 진리였던 것이며 그런 만치 폭력으로 얼룩지고 깨어진 이 인간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유일한 능력이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유일한 해결책인 비폭력의 길 곧 죽음[의 능력]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나와 이웃이] 사는 논리, 선으로써[만] 악을 이길 수 있는 논리, 이것이 복음의 방정식이며, 구원의 진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바로 이 진리를 만 천하에 드러낸 구속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공격해 올까 방어하기 위해, 나아가서 아예 공격해 오지 못하도록 선제적으로 억지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인간관계라면, 반대로 상대방의 인권을 선제적으로 존중해주고 상대방을 공격하기는커녕 상대방을 위하고 보호해 주고자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라 하겠습니다. 전자는 상대방을 위험스러운 존재로 규정하여 멀리하고 내치려는 반면, 후자는 상대방을 귀중한 존재로 규정하여 가까이하고 보호하려는 접근이라 하겠습니다. 전자는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지만 후자는 상대방을 친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공격이 최상의 수비인 것처럼, 실은 사랑이 최상의 안전인 셈입니다. 사랑 없는 호신에만 의지한다면 언제까지나 불안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사랑이 있다면 호신은 굳이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으로 접근하였음에도 결국은 배신을 당하고 역공을 당할 때가 있을 테지만, 그런다 할지라도 끝까지 맞서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때라야 내 사랑의 진정성이 입증될 것이며 또 복수혈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서 너무 멀리 이탈한 나머지 사랑은 말라붙고 적대감이 만연하게 된 삐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상에서는 무기를 내려놓으면 모든 게 다 끝나고 벼랑 끝으로 떨어질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사랑이 결국은 모든 것을 이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벼랑 끝으로 밀려 나게 된다 해도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총기 허용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계속되어 왔으나,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접근을 하기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접근에 온통 신경을 쓰는 동안 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더불어 함께 살며 피차 서로 먼저 존중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어떻게든 경계하고 방어해야 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고착되어 온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긴장과 두려움의 네트 워크 안에서 우리의 사랑의 능력은 점점 쪼그러 들고 적대감은 점점 더 부풀어 오르게 된 것은 아닐까요? [전장의 공포가 소위 PTSD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인 케이스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총기가 아니라 관계인데, 우리에게는 이제 [깨어진] 관계는 보이지 않고, [그 깨어진 사람이 들고 있는] 총만 보이게 된 것은 아닐까요? 문제는 총기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인간의 허용/포용 여부인데, 우리는 발사된 총기만 보이고 깨어진 인간은 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심지어 나를 해치려고 총을 겨누고 있는 그 사람 역시 원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동류 이웃임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아가서 그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 총알이기 한참 이전에 그의 깨어진 마음이며, 아픔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한 것이 아닐까요? 물론 마음이 상하고,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에게 총기가 들려지지 않도록 법을 만들고 감시를 해야 하겠지만, 상하고 삐뚤어진 마음을 보듬고 포용할 수 있어야 궁극적인 대안책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총기를 빼앗는다고 삐뚤어진 마음이 바루어지진 않겠지만(어떻게든 다시 총기를 손에 넣으려 할 것이며 미국처럼 총기가 사방에 널려 있는 사회에서 이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바루어지면 총기의 허용여부는, 허용을 하든 또는 하지 않던,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총이 인간의 마음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총을 컨트롤 [해야]하는 법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그냥 둔 채 총의 문제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총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총기를 규제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지만, 실은 총에 초점을 맞출수록 사람은 그만큼 더 뒷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총기를 휘두르고 무차별 살인을 하는 것이 결코 정당화되어서도 안 되고 또 정당화 될 수도 없겠지만, 오죽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의 목숨을 그리도 함부로 경시하게 된 것인지, 그 사람 주변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심어 주었던 것이며 그를 어떤 식으로 [하]대하여 왔던 것인지 등등 우리가 주목해야할 본질적인 문제는 제쳐 두고 어떻게든 총기를 규제함으로 총알을 피할 것인가 하는 당장의 이슈에만 매달린다면 총기로 인한 비극은 영원히 반복될 것입니다. [한 아이가 한 사람으로 양육되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한 아이가 제대로 양육되지 못하였다면, 마을 전체가 병이 든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야하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해결책을 급조해 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살아있는 인간적인 사회를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을진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극단적인 폭력을 너무도 쉽게 저지르게 하는 총기는 일단 개인에게 허용하지 않도록 컨트롤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총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리고 만일 총기까지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개인의 자유가 확보된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부정적인 관계에서 긍정적인 관계로 반전시킬 때까지 만이라도 일단 극단적인 살상의 위험을 안고 있는 총기 자체의 허용을 유보하자는 [법]안에 합의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호주의 성공 사례가 없었다 해도 만시지탄이라고 해야 할 텐데,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헌법 제 2조를 입안할 때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은 [시대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무엇보다 거대 도시의 탄생으로 인한 익명성 도피적 개인주의의 극단화로 인해] 여러 모로 달라졌음 또한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희생자 수가 늘어나기 이전에 [진작에] 심각성을 감안해야 했어야 했는데 벌써 오래 전에 임계점이 지난 것 같습니다. 로비스트들에 휘둘려서 궤변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만시지탄이지만 정치권과 학계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겸허히 지혜를 모으고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후손들에게 위대한 아메리카를 물려주기 원한다면, 우선은 이런 어리석은 총기 남용과 그로 인한 안타까운 주검의 소식만이라도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인 핍절로 인한 절박한 상황에서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대륙 행을 결행하였던 필그림들이었지만, 그 후예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러니하게도 총기를 앞세운 지배와 군림의 논리를 좇아가는 그저그런 나라로 변해 갔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인디언들과 더불어 생존권을 다투면서 그[적]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총기 사용을 자제하기란 힘들었을 것입니다. 막강한 영국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나서서 총을 들어야 했고 사냥에 익숙한 스나이퍼(명사수)들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독립 전쟁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힘의 논리가 오늘의 총기 사용을 정당화하는 근거이자, "강한" 미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략이자 정책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면 미국은 더 이상 위대한 나라가 아닙니다.

인디언들을 산골짜기에 금고하던 시절, 노예 시장이 건재하던 시절, 흑인과 여성의 참정권을 태생적으로 박탈하던 시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서 핵폭탄을 실제로 실험하던 시절, 베트남 전쟁에서 무고한 양민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무차별로 빼앗던 시절은 과거여야지, 현재 진행형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근자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이란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위대한' 아메리카와는 걸맞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작금에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무차별 학살 사건은 결코 '위대한 미국'의 이미지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겠습니다. 과연 이런 힘의 논리를 아이덴티티의 일부로 내재화해 온 미국이 진정으로 "위대"해질 수 있는 걸까요? 예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얼마 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교훈이라도 제대로 이해한다면, 여전히 완력과 무력을 힘으로 잘못 규정하고 있는 논리적인 프레임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며, 적어도 총기 규제 정책에서만이라도 뭔가 그 기미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과감한 결단이 없는 이상 총기사용을 둘러싼 딜레마는 언제까지나 미국을 괴롭힐 것이며, 미국은 '위대한 야만국' 내지 결코 "안전하지 않은 문명국"이란 오명을 벗기 힘들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회의 위대함은 힘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그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치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권영석 목사 / 전 학원복음화 협의회 대표

권영석 newsm@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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