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그곳에도 교회가 존재했고, 존재한다?
이집트 그곳에도 교회가 존재했고, 존재한다?
  • 김동문
  • 승인 2017.04.18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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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교회 등에 대한 오해 벗기가 필요하다
4세기 중엽 이집트 홍해에서 멀지 않은 사막에 지어진 성 안토니 수도원.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의 수도원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집트에도 교회가 있어요? 이슬람 세계는 무슬림만 있는 곳이 아닌가요?"

최근에 만난 한 지인이 내게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은 얼마전 이집트 북동지역의 딴따와 북부 지중해 해안도시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종려주일 미사를 드리던 교회에 대한 폭탄 테러가 벌어지고 43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 뒤에 내게 던져진 질문이었다. 이집트는 거의 1천만 가까운 기독교인이 존재하고 그 역사도 2천년에 이른다고 대답하면서, 중동 지역 교회에 대한 무지 또는 오해가 안타까왔다. (이 글은 '중동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대장간)의 130-133쪽의 내용을 다시 다듬었다.)
 
로마에서 복음이 시작되었나?

아랍 이슬람권 선교를 떠올리는 이들은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나 복음의 서진이라는 어휘가 조금은 익숙할 것 같다. 로마에서 시작된 복음이 서쪽으로 전해져서 한국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불모지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생각은 한국선교운동의 기본 이슈가 된지 오래이다.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안 이들이 많다‘.

예루살렘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키워드인 복음의 서진에 대해서는 지적이 필요하다. 복음의 서진 논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편견이다. 우리가 배운 서양) 세계사를 세계사로 오해하는 것이나 로마 천주교) 교회사를 교회사로 오해하는 것도 금시초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교회사의 중심에는 로마 교회만 있지 않았다. 복음은 서진으로만 이뤄지지 않았고 동진의 역사 또한 분명하고 선명하다.

중동에도 교회가 있었다.

주후 50년 전후 교회는 이미 로마 교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 예루살렘 교회,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등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던 시기가 있었다. 동서 로마 제국으로 정치적 분열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도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로 분열되었다. 이후의 역사나 교회사에 대하여 우리들이 대한 것은 서로마 제국과 로마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사와 서양 세계사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들은 교회사를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인들을 통해 접했고, 세계사를 유럽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배웠기 때문이다. 유럽 중심 사관에 의해 무시당하고 잊혀졌지만 동방 교회나 동방 세계사는 여전히 흘러왔다.

넓은 의미의 동방 교회는 복음의 동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미 2~3세기에는 오늘날의 중동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지역에까지 복음의 확장을 이뤄냈다. 동방 교회사나 중동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살펴보면 이 같은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한 북아프리카 사역과 아라비아 반도 사역, 사도 도마가 인도에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교회의 전통, 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까지의 복음의 동진이 있었다는 흔적들은 적지 않다. 순교자 저스틴(103~165년 ) 이나 터툴리안(155~230년 ) 같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바울이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기 이전까지 그 또한 복음의 동진 대열에 함께 했었다고 볼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현장에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복음은 서진 만이 아닌 동서남북으로 뻗어졌고 그 가운데 아라비아에서 온 믿는 자들을 통해 동진도 있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전통이 이집트 정교회(콥틱교회)로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 안에 9백만, 해외에 1백만명 정도가 있다.

중동에도 복음의 그루터기가 있다.

복음의 동진 역사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다수의 무슬림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서구의 종교이며 서구 이데올로기라는 거부감을 넘어서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슬람은 전통 종교이고 기독교는 서구의 외래 종교라는 인식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복음의 동진을 고려하면 이슬람 이전에 기독교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과 다수의 무슬림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섬겨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의 동진 역사를 염두에 둔다면 이른바‘ 백 투 예루살렘 운동’에서 말 하는 예루살렘에까지 복음이 전파되는데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다는 58개 이슬람 국가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더 이상 중동과 중앙아시아 이 슬람 국가 58개국은 부담스런, 넘어서야 할 어떤 타깃이 아니다. 복음의 불모지가 아니라 복음이 확장되고 꽃을 피웠던 지역, 복음의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지역으로 이 지역을 이해하여야 한다. 복음의 선포나 확장을 위한 ‘백 투 예루살렘’이 아닌 복음의 회복을 위한 발걸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슬람 이전 꽃을 피웠던 중동의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중동, 배우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결국 복음의 동진에 대한 이해는 은근한 문명충돌론적 선교를 넘어서도록 도울 것이다. 복음을 통한‘ 땅의 회복이나 정복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줄 것이다. 선교 현장에서‘ 우리가 처음은 아니다’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거기 계셨고 계시며 계실 것을 고백하여야 한다. 또한 나보다 더 앞서서 허다한 주님의 사람들이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런데, 복음 전파의 종착점은 있는 것일까? 선교는 땅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체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실제적인 종착점이 될 수 있는가? 성경 시대의 땅 끝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그 시절 그 끝에 이르면 낭떠러지가 있어 죽는다고 했던‘ 그 땅 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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