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습과 신도의 우민화
교회 세습과 신도의 우민화
  • 신성남
  • 승인 2014.08.26 18:05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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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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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남[1] 2014-08-27 06:30:35
본문에 미리 밝힌 대로 입다의 이야기는 성경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분들은 입다의 서원은 이방의 풍습을 따른 잘못된 서원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므로, 그의 딸의 죽음은 이삭의 사건과 달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 사건을 단지 입다의 성급한 실수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의견도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입다의 딸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대로 같지 않고, 따라서 그것을 예표한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보기도 힘듭니 그건 전적으로 입다의 책임이란 점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몇가지 강력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입다의 서원은 승리를 간절히 바라며 기원한 서원입니다. 즉 백성을 구하고자 한 죽음의 서원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으심과 유사합니다.

2. 입다의 딸이 그 죽음에 순종한 것 역시 이삭의 순종처럼 예수님의 순종을 연상케 합니다. 이 세 사건 모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3.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특별한 예외는 있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도 (본래 진의는 아니었으나)그런 명령을 하신 적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을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신성남[2] 2014-08-27 06:27:36
물론 이는 매우 단순한 팩트만의 비교입니다. 굳이 그 세 사건을 별로 유사하지 않다는 관점으로 엄격하게 분석하여 비판한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문자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수많은 다른 예언들이나 예표들에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과연 그 중에 얼마나 자신있게 이건 예표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 큰 의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전체적 내용으로 딱 맞게 비슷한 사건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부분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부분적 일치가 본래 예언과 예표의 특징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이삭의 경우도 입다의 딸처럼 동일하게 '번제'로 준비되었는데, 굳이 이삭만 '대속의 제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결론을 요약드리자면, 입다의 서원이 암몬의 몰록을 따른 이방종교적 잘못일수도 있고 또는 다른 오류일수도 있지만, 그 점이 백성을 구하고자 한 입다의 순수성과 그의 딸의 죽음까지 과소 평가할 기준이 된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백성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식솔까지 희생할 각오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끝까지 지켰고 그의 딸도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다만,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의 그 마음이 바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이다"고 생각한 것은 필자의 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니, 이를 객관화하여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미리 밝힌 대로, 이 문제를 신학적 논쟁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연 그 누가 이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오로지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감히 단정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난제는 그냥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단지 그 사건에서 일반적이며 객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공통점을 최대한 수용하면 좋겠습니다.

루이스[2] 2014-08-27 00:07:11
입다의 결국 ‘딸을 바치게 되는 결과를 낳는’ 서원은 암몬자손과의 관계에서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 결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쟁의 승패가 입다의 서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다의 서원에 따라 승리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빗나간 신앙심으로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삿11:29)... 그리고 그가 서원한 것(31절)이 나오고, 후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11:32)가 나온다. 전쟁은 입다가 서원을 하면 잘 되고, 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아니다. 서원이 하나님과의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입다가 생각한 것은 동물이 나오는 것이라고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미드라쉬(입다의 서원을 잘못된 것으로 묘사)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경우(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다른 안목과 해석이 필요)에도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하시고 있으며, 이런 인신제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본받지 말 것을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시다(레20, 신12,18장).
신성남님의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은 이 본문은 기반으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며, 그 주장도 칼럼을 쓰는 분으로 그렇게 날카롭지 않아 보인다.
비판을 받아야 하는 대상에 자신이 빠져있다. 우리 모두가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어떤 무리들만의 문제인가? 양비론이 아니라, 한 집단만이 고치면, 그들 목회자 집단만이 잘하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루이스 [1] 2014-08-27 00:06:16
신성남님의 글은 읽을 때마다 무엇인가 모르는 불편함이 있는데, 그것이 가시질 않는다. 비판의 내용은 합당한데, 마음이 가질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이 분이 상처와 절망을 품고 있는 그 교회를 그래도 건설하고자 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나 하듯이 쉽게 할 수 있는 비평이나 하고, 더욱이 그 결과로 파괴하고자 하는 것인지, 나 자신이 헷갈려서 그런 것 같다. 이것은 단지 내게 드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점도 밝혀야겠다.
입다의 사건은 모두에게 불편하다.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그런 사건은 바로 우리를 말하는 것이기에 더욱 불편함을 준다.
입다는 이렇게 등장한다. 삿11:1-3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이 입다의 개인적인 가족 배경이 그가 창대하게 시작 하였다가 이렇게 미약하게 끝나는 것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암몬을 항복(20개 도시를 파괴)시키지만, 동족 에브라임지파와의 불화로 4만2천을 죽이게 된다. 딸을 번제로 드린 사건은 이 두 사건 중간에 있다.

합동신학교 2014-08-26 22:55:37
합동신학교 (개혁합신) 에서도요? 어느 교회인가요? 그럴 큰 대형교회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