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축하 합니다?
세월호를 축하 합니다?
  • 지성수 목사
  • 승인 2024.04.1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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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열리는 세월호 10주기 예배에서 참여 했다 ‘바람의 세월’을 감독한 문종택 씨를 오랫만에 만났다. 문종택 씨는 딸 지성이를 바다로 보낸 후 ‘4.16TV’를 만들어 지난 10년 동안 카메라를 들고 기록을해왔다. 그런데 나보다 10 여살이나 젊은 그의 너무 변해 버린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2017년 지성이 부모를 시드니에 초청해서 여러 가지 추모 행사를 가졌을 때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간담회에서 어려서 이민을 와서 한국말이 서툰 한 여성이 눈물을 씻으며 유가족의 손을 잡고 “세월호를 축하할게요.”라고 해서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세월호를 remember 한다는 뜻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한국말을 찾지 못해서 그만 ‘축하한다.’고 해 버린 것이다. 나의 설명으로 비로소 웃음이 돌아왔지만 황당한 순간이었다.

두 번째는 동네 시인(지역문학회 회원) 여자가 유가족에게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안되니 분노를 버리고 치유를 받아야 한다.”고 설교를 늘어 놓는 일이 벌어졌다.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할 수 없이 내가 “그런 이야기는 해당이 안 된다.”고 잘라버릴 수 밖에 없었다. 전자가 문화의 차이라면 후자는 인간됨의 차이라고 하겠다. 세월호를 놓고 벌어진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불합리와 모순에 비하면 한 방울의 포말보다 못한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전혀 의미가 없다고는 볼 수 없는 해프닝이었다.

이날 나에게 예배 의식 보다 인상적인 것은 소명학교 정승민 선생이 당시를 회상하면서 희생자를 크게 만들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대한 이야기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에도 그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었다. 고등학교 2 학년이라면 정신적으로는 미숙한 면이 있어도 육체적으로는 이미 성인이다. 그런 아이들이 물론 배가 빨리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수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즉 3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배가 심하게 기울어도 선실에서 나오지 않고 참변을 당하도록 만들었던 정신적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재난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당하는 당사자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위기 상황에 대처해야 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선 당사자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나이나 어떤 구별도 한계도 없다. 오직 생사의 기로에 직면한 당사자의 판단만이 유효할 뿐이다.

그런데 잘못된 메시지를 신뢰하고 기다렸다. 비록 혼란이 오더라도 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구명쪼기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기만 했더라면 좀 더 많은 숫자가 살 수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절대 절명의 순간까지 그렇게까지 순종적이었을까?

만일에 당시에 내가 살던 호주 사회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했다면 세월호의 학생들처럼 수동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백인들은 조금이라도 자기편에서 이해가 되지 않거나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일부 외신들 가운데서는 이번 사고의 원인에 대해 독립적 사고와 자립적인 결정이 낯설고 어려서부터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이나 높은 위치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듣고 따르는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나온 결과라고 논평을 한 곳들도 있었다.

집회장에서 돌아오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이 1986년도 출판해서 사회과학에 유성의 충돌 같은 충격을 주었다는 ‘위험사회’가 생각이 났다. 그 책에서 울리히의 벡은

“부는 상층에 축적 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 된다.”고 했다.

1차 근대화와 2차 근대화가 있다. 기술개발과 경제성장 그리고 양적인 안전을 추구한 게 1차 근대화다. 기술이 경제를 살리고 안전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던 시대이다. 과학이 종교를 대신했고 과학자의 얘기는 신앙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방사능, 유전자조작식품 등 과학기술이 야기한 불특정한 위험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총정리판이었다. 한국 국민은 아직 성찰적 근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에 이어 이태원 참사는 아프리카의 어느 신생 국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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