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세습과 신도의 우민화
교회 세습과 신도의 우민화
  • 신성남
  • 승인 2014.08.26 18:05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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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합신 교단' 너마저 세습하는가
▲ 신성남 © 뉴스 M

구약 사사기서를 읽다 보면 아주 난처하고 어려운 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길르앗 입다의 이야기입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 왔을 때 그는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전장에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입다는 하나님께 엄청난 서원을 하나 말하고 나갑니다.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을 이기고 집에 돌아 온 그를 제일 먼저 영접한 사람은 하필이면 그의 무남독녀였습니다.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했습니다. 그는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울부짖습니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그러자 입다의 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그리고 입다의 서원대로 그녀는 번제의 제물이 되어 불태워져 죽습니다.

딸을 제물로 바치다니

필자는 이 슬픈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너무 기가 막혀서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며칠 밤을 설치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황당하고 무섭고 참담하고 억울하고 비정하고 답답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고 전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분명히 실화인데 아무리 이해할려고 애써도 이게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우선 입다가 그런 무서운 서원을 한 것부터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짐승도 아닌 사람을 잡아 번제로 드리겠다고 한 발상 자체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구나 하필이면 그 시간에 왜 그의 딸이 먼저 나왔을까요.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들의 풀꽃과 공중의 새들과 야생의 짐승들마저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그 착하고 착한 딸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도록 두시다니 너무 야속했습니다. 그러니 필자의 번민은 더욱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비통했을까요.

필자는 지금도 다른 신학자들이나 주석가들이 이 사건을 어찌 해석하는지 잘 모릅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무슨 신학적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으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온 백성의 목숨이 걸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백성들이 살려면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입다가 그런 무서운 서원을 그리 쉽게 함부로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주목해야 할 점은 입다가 서원을 하고 전쟁에 나가 이긴 그 순간부터 그의 집안에서 한 사람의 죽음은 이미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근 한 주간 동안 그 사건을 묵상하고 방황하던 제게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마음 속에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이상한 신비 체험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한 생각이 제 단단한 마음을 산산히 조각내었습니다.

"자식을 번제로 바친 입다의 마음, 그게 바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다!"라는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엄청나구나 하는 감사와 감격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아울러 그 즉시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쓰나미 덕분에 그 날 온종일을 젖은 가슴으로 보냈습니다.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무더기 세습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무더기로 교회를 세습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권력 세습과 부의 세습도 큰 비난을 받고 있는 때에 목사란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를 자식에게 공공연히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고생길이 뻔한 농어촌이나 도시 변두리의 미자립 교회는 기피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중대형 교회들을 주로 물려줍니다.

물론 이렇게 담임목사의 자식에게 특혜를 주어 넘겨주다 보니, 엄중하게 공개 경쟁을 했다면 당연히 떨어졌어야 할 자격 미달의 애송이 목사들이 공교회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일찍이 세계 교회사에 유래가 없던 일입니다. 누가 억지로 시킨 목회도 아니고 자신들이 스스로 소명이라고 선택한 십자가의 길이건만, 남의 자식은 몰라도 내 자식 고생하는 것은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비난을 하든 말든 무슨 구실과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코 교회를 자식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고작 내놓는 핑계가 "교인들이 간절히 원해서"라고 합니다. 아니 교회가 비싼 연봉 지급하며 목사직을 맡겼으면, 교인들을 바르게 가르쳐서 오히려 세습의 불의함을 이해시키고 잘 설득해야 옳건만 그걸 핑계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원하면 어떤 부정을 행해도 된다는 것인가요. 이게 북한의 지도자가 "인민이 너무 원해서 세습했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평소엔 성경을 잘 인용하며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명철하게 날고 뛰던 분들이 막상 자기 밥그릇과 자식의 안위가 걸린 문제에 오니 갑자기 전기 나간 밥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정녕 가난한 목수 예수님의 제자들일까요. 이 자들이 정말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의 마음을 알고, 아들을 골고다 언덕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들일까요. 십자가를 지기는 커녕 도리어 십자가를 짓밟고 있는 것이 오늘날 많은 중대형 교회 세습 목회자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기만하여 빚 내서 큰 건물 세우고, 그 건물 덕에 많은 신도들 모아, 복 많이 받는다고 무당처럼 사기쳐서 헌금 부추기고, 신도들 몰래 고액 연봉 받아가고, 추가로 짭짤한 외부 강사비 챙기고, 자식들 호화 유학 보내고, 집회 핑계로 해외 여행 흥청거리고, 교회 돈으로 알량한 재단이나 법인체 만들어 공금 빼돌리고, 교회 장부 숨기며 헌금을 눈먼 돈처럼 사용하고, 그리고 뒤로는 여신도들 농락하여 울리며 희희낙락하는 목사들이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튼 요즘은 정말 목사가 도적질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적이 목사질을 하는 것인지 영 헷갈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패한 종교 업자들보다 더 부끄러운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단의 지도자요, 원로요, 교수요, 큰 목사요 하며 경건한 척 하지만, 뒤로는 자기 실속을 다 찾아 먹고 저런 불의한 자들에 대해 일절 입을 다무는 목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비록 이들의 설교와 가르침은 반짝반짝 빛이 날지 모르지만, 실제 행위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입니다.

신도 우민화 없는 교회 세습은 없다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결코 신학이나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원래 그런 무리들이니 별개의 문제입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소위 정통이란 교회들 상당수가 신도들을 우민화하고 맹신화한 후 노골적으로 세습하고, 장부 숨기며 횡령하고, 성추행하고, 그리고 종교적 사기를 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요. 경건하고 유능한 당회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에서 세습이 가능할까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함부로 어설프게 그런 시도를 하다가는 오히려 담임목사직에서 쫓겨나기 십상입니다. 즉 신도의 우민화 없이 교회 세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시고 명철하신 목사님들도 그런 사실을 매우 잘 압니다. 그래서 교회 세습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필수적 과업을 수행한 후에 세습을 단행합니다.

먼저 수십 년에 걸쳐 당회원과 제직들을 꾸준히 물갈이합니다. 너무 똑똑하고 까다로운 장로와 제직들은 한직으로 보내거나 밀어내고 다소 모자라지만 목사에게 순종 잘하는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중직에 기용합니다. 실제로 보면 신앙적으로 견실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리에 연연하며 목사에게 과잉 충성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당회와 제직회가 어용화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가 되면 나머지 교인들을 매주 설교로 세뇌하고 맹신화하는 것쯤은 아예 식은 죽 먹기가 됩니다.

이와 동시에 노회나 연회나 총회 등 교단의 주요 거물급 목사들을 수시로 초빙합니다. 부흥회, 특별 집회, 저녁예배 등 그 방법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리고는 교인들의 피와 땀이 어린 헌금을 강사비란 명목으로 아주 듬뿍듬뿍 주어서 보냅니다. 대형 교회인 경우 이렇게 퍼주는 돈이 개인에 따라서는 총누적액으로 볼 때 수백만 원 또는 수천만 원이 되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쥐약을 미리 잔뜩 먹여 놓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게 말이 강사비이지 사실은 뇌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중에 이 돈을 받아 먹은 목사님들은 얌전한 '벙어리 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전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세습을 밀어부치면 거의 백발백중 성공합니다. 그래서 "교회 세습 못하면 바보, 안하면 등신"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목사의 얼굴이 전문 사기꾼들보다 조금만 더 두꺼우면 됩니다. 그 누가 비난해도 경건한 모습으로 얼굴에 철판깔고 철면피처럼 잘 버텨야 하니까요.

하여튼 이젠 '개혁주의신학'을 자랑하며 틈만 나면 세미나 열고 분주하던 '합신 교단'마저 대형 교회를 세습했다고 합니다. 비교적 매우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자타가 인정하던 교단입니다. 게다가 그 세습 목사는 총회장까지 했던 분이랍니다. 윗물이 이 모양이니 아랫물은 또 어떨까요. 이 바람에 또한 큰 용기를 얻어 서로 눈치를 보며 세습 줄에 대기 중인 다른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양심의 찌꺼기에게라도 좀 물어보십시요. 과연 '개혁주의신학'과 '교회 세습'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묘비조차 거부했던 칼뱅도 자신이 세운 장로교회가 이렇게까지 저질화하여 비루한 일을 저지를 줄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교단의 뛰어나신 유명 목사님들 다 어디에 계신지 마냥 조용하기만 합니다. 필자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김명혁, 홍정길, 박영선, 박형룡, 홍민기, 그리고 이선웅 등 아주 멋진 목사님들이 모두 이 합신 교단의 지도자급 원로들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요. 교회가 몰락할 때는 단 한번의 실수로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고,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법입니다. 처음엔 세습만 봐주라 다른 것은 잘하겠다고 변명하고, 다음엔 뇌물성 강사비나 수고비를 슬그머니 얻어 먹고, 그 다음엔 공금 횡령 못본 척 하고, 또 나중엔 성추행을 눈감아 주고... 이런 식으로 하나씩 허용하며 타락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갑자기 몰락하는 것입니다.

신학은 정통이나 사역은 사이비

요즘 어떤 교회들을 보면 '신학'은 비교적 정통인데 '사역'은 이만저만 사이비가 아닙니다. 수십 년간 학연, 지연, 그리고 혈연으로 똘똘 뭉친 직업 종교인들이 이미 통제 불능의 '종교 마피아'를 형성하고 구조적이며 조직적인 부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큰 목사'란 자들의 그늘 아래에 있는 '작은 목사'들은 아예 입도 뻥긋 못 합니다. 그 앞에서 순진하게 교회 개혁이니 갱신이니 그런 바른 말을 무심코 뱉었다가는 그 날로 끝입니다.

이렇게 푹푹 썪었으니 여러 교단이나 연합체의 선거철이 되면 감히 목회자란 자들이 서로 윗대가리가 되겠다고 패거리로 몰려 다니며 얼굴 몰수하고 뇌물을 주고 받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 하늘 아래 이처럼 타락한 교회가 지구촌 또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행히 아직도 우리에겐 신실한 목회자들과 건강한 교회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한국교회의 총체적 부패를 그냥 방조하고 정당화해도 좋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특히 자기 교단의 세습 문제에 있어서 방관적 침묵은 곧 적극적 동조와 마찬가지의 악행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길르앗 입다의 이야기가 괜히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남의 자식은 고생해도 괜찮고 내 자식만은 안 된다는 목사는 제발 목회하지 마십시요. 자식을 제물로 바친 그 비장한 마음을 이해 못 하신다면 함부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지 마십시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의 그 마음을 진정 모르겠다면, 거룩한 교회를 사유화하여 사이비 장터로 만들지 말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모두 물러나라는 말입니다. 세습 목사는 양들에게 참된 '목자'가 아니라 그냥 '업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깨어있는 개혁 성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비록 교회와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예수님의 제자된 '바른 삶'과 '거룩한 사역'을 결단코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사56:10-11)."  

신성남 집사 / <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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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신학교 2014-08-26 22:55:37
합동신학교 (개혁합신) 에서도요? 어느 교회인가요? 그럴 큰 대형교회가 있나요?

루이스 [1] 2014-08-27 00:06:16
신성남님의 글은 읽을 때마다 무엇인가 모르는 불편함이 있는데, 그것이 가시질 않는다. 비판의 내용은 합당한데, 마음이 가질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이 분이 상처와 절망을 품고 있는 그 교회를 그래도 건설하고자 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나 하듯이 쉽게 할 수 있는 비평이나 하고, 더욱이 그 결과로 파괴하고자 하는 것인지, 나 자신이 헷갈려서 그런 것 같다. 이것은 단지 내게 드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점도 밝혀야겠다.
입다의 사건은 모두에게 불편하다.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그런 사건은 바로 우리를 말하는 것이기에 더욱 불편함을 준다.
입다는 이렇게 등장한다. 삿11:1-3 [1]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2]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3]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이 입다의 개인적인 가족 배경이 그가 창대하게 시작 하였다가 이렇게 미약하게 끝나는 것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암몬을 항복(20개 도시를 파괴)시키지만, 동족 에브라임지파와의 불화로 4만2천을 죽이게 된다. 딸을 번제로 드린 사건은 이 두 사건 중간에 있다.

루이스[2] 2014-08-27 00:07:11
입다의 결국 ‘딸을 바치게 되는 결과를 낳는’ 서원은 암몬자손과의 관계에서 무슨 역할을 한 것일까? 결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쟁의 승패가 입다의 서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입다의 서원에 따라 승리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빗나간 신앙심으로 그렇게 한 것에 불과하다.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삿11:29)... 그리고 그가 서원한 것(31절)이 나오고, 후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11:32)가 나온다. 전쟁은 입다가 서원을 하면 잘 되고, 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아니다. 서원이 하나님과의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입다가 생각한 것은 동물이 나오는 것이라고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미드라쉬(입다의 서원을 잘못된 것으로 묘사)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경우(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다른 안목과 해석이 필요)에도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하시고 있으며, 이런 인신제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본받지 말 것을 여러 번 말씀하고 계시다(레20, 신12,18장).
신성남님의 교회를 향한 안타까움은 이 본문은 기반으로 삼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며, 그 주장도 칼럼을 쓰는 분으로 그렇게 날카롭지 않아 보인다.
비판을 받아야 하는 대상에 자신이 빠져있다. 우리 모두가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정도로 어떤 무리들만의 문제인가? 양비론이 아니라, 한 집단만이 고치면, 그들 목회자 집단만이 잘하면 다 잘 되어갈 것인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신성남[2] 2014-08-27 06:27:36
물론 이는 매우 단순한 팩트만의 비교입니다. 굳이 그 세 사건을 별로 유사하지 않다는 관점으로 엄격하게 분석하여 비판한다면, 그것 역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문자적으로 '엄격한 잣대'를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수많은 다른 예언들이나 예표들에 동일하게 적용한다면, 과연 그 중에 얼마나 자신있게 이건 예표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지 큰 의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전체적 내용으로 딱 맞게 비슷한 사건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부분은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부분적 일치가 본래 예언과 예표의 특징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이삭의 경우도 입다의 딸처럼 동일하게 '번제'로 준비되었는데, 굳이 이삭만 '대속의 제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결론을 요약드리자면, 입다의 서원이 암몬의 몰록을 따른 이방종교적 잘못일수도 있고 또는 다른 오류일수도 있지만, 그 점이 백성을 구하고자 한 입다의 순수성과 그의 딸의 죽음까지 과소 평가할 기준이 된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백성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식솔까지 희생할 각오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끝까지 지켰고 그의 딸도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다만, "딸을 제물로 바친 입다의 그 마음이 바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이다"고 생각한 것은 필자의 극히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니, 이를 객관화하여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미리 밝힌 대로, 이 문제를 신학적 논쟁으로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과연 그 누가 이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오로지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감히 단정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난제는 그냥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단지 그 사건에서 일반적이며 객관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공통점을 최대한 수용하면 좋겠습니다.

신성남[1] 2014-08-27 06:30:35
본문에 미리 밝힌 대로 입다의 이야기는 성경 난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분들은 입다의 서원은 이방의 풍습을 따른 잘못된 서원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므로, 그의 딸의 죽음은 이삭의 사건과 달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 사건을 단지 입다의 성급한 실수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의견도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입다의 딸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대로 같지 않고, 따라서 그것을 예표한다고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서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보기도 힘듭니 그건 전적으로 입다의 책임이란 점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몇가지 강력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입다의 서원은 승리를 간절히 바라며 기원한 서원입니다. 즉 백성을 구하고자 한 죽음의 서원입니다. 그리스도가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으심과 유사합니다.

2. 입다의 딸이 그 죽음에 순종한 것 역시 이삭의 순종처럼 예수님의 순종을 연상케 합니다. 이 세 사건 모두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3.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특별한 예외는 있었습니다. 이삭의 경우에도 (본래 진의는 아니었으나)그런 명령을 하신 적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선택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사람을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